1. 카이사르의 삶과 <갈리아 전기>의 편찬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7월 12일 귀족 가문인 율리우스 가문에서 태어났다. 당시 로마 사회는 마리우스를 대표로 하는 민중파와 술라를 대표로 하는 원로원파가 로마 통치의 주도권을 놓고 피비린내 나는 권력 싸움을 하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가문인 집정
카이사르는 이미 정치적 거두들과 제휴하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동방의 질서를 회복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지만, 이탈리아로 돌아온 BC 62년에 그의 군대가 해산되자 원로원은 그가 제대군인들에게 나누어줄 땅을 확보하지 못하도록 했다. 꾸준히 폼페이우스와 우정을 나눈 카이사르는 이제
카이사르는 다양한 말터를 사용하고 있다. 민족 말터, 행적 말터, 반대 말터를 사용하였는데, 먼저 민족 말터이자 동시에 행적 말터인 조상들의 선례를 들며 자신의 주장에 대한 신뢰를 얻고 있고, ‘분노나 자비에 사로잡혀 멸망한 다른 군주와 민족들’과 ‘공정성에 입각해 결정한 우리의 조상’의
카이사르의 정책은 시대가 요구한 자연스런 따름이라고 본다. 이미 거대해진 로마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여러 곳의 분란을 막고 주적(主敵)을 한정지어야 했다. 최고 결정권자는 황제 하나인데 반하여 처리해야 할 지역은 광대하며, 더구나 순서대로 쳐들어오는 것이 아닌 동시 다발적으로
카이사르의 업적 요약
◇체제구축 및 개혁을 통한 국가 개조:카이사르는 로마의 영토가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국경선을 서유럽과 아프리카 북부 그리고 소아시아로 정하고, 이러한 광대한 영토를 기능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공화정보다는 제정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공화정 제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