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침을 철회하고 EU 의장국인 영국도 밀로셰비치 대통령을 만나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신 유고연방은 코소보문제를 순수한 국내문제로 간주하여 국제사회의 개입 및 코소보의 분리 독립을 거부하였으며, 이에 대해 코소보 알바니아인은 국제사회의 적극적 개입을 유도하였다.
코소보의 독립에 대한 주민투표를 실시한다는 정책
수용 거부, 코소보 해방군의 저항을 넘어선 독립전쟁의 가능성으로 인해 발칸반도에서 새로운 불안정이 형성되자 결국 미국과 나토는 주권보다는 인권이 우선한다는 명분으로 1999년 3월 24일 세르비아에 대한 공습을 시작하였다. 1999년 6월 10일 나토
사태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시리아 사태는 지역적·국제적으로 중요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시리아는 이란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며, 시리아의 내전은 이란과 지역의 반(反)이란 적대세력들 사이의 ‘대리전’이기도 하다. 국제적으로 러시아는 아사드 정권의 주요한 외교적 보호자로
독립이 시작된 것이었으나,
이미 미국과의 새로운 전쟁은 예고 되어 있었다.
베트남 민중은 프랑스에 이어 일본 제국주의, 다시 프랑스,
그리고 이제는 미국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중국의 영향과 수많은 외침에 시달린 끈질기고
강한 민족성을 지닌 역사적 전통은
한국과 매우
1. 코소보사태
‘실시간으로 본 전쟁’ 에 대한 최초의 기억
잘 알지 못하는 이국의 녹색 밤하늘을 쉴 새 없이 횡단하던 수많은 미사일들, 폭발하는 건물들, 죽어가는 사람들의 숫자들에 대해서 계속 이어지던 소식, 분쟁지역에 대한 추가 병력 증원에 대한 보도 등, 나는 13년 전인 1998년, 어느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