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발발과 함께 사태는 호전되었다. 75세의 고령인 크로포트킨은 서둘러 조국으로 돌아왔다. 1917년 6월 망명한 지 40년 만에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임시정부의 교육장관직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퉁명스럽게 거절했다. 19
상호주의(mutuallism), 꼬뮨주의(communism)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후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주장한 막스 슈튀르너나 바쿠닌에 의해 리버테리안(Libertarian)이나 자유사회주의란 말이 등장했고, 크로포트킨에 의해 아나르코 코뮤니즘(무정부 공동체주의)에 이르는 다양한 유형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 다양한
Ⅰ. 서론
흑우회는 박열 등 고학생들의 주도로 결성되었다. 결성 후 이들은 주로 출판사업과 일본단체와의 연대활동, 그리고 비밀결사 활동에 주력하였다. 박열과 金子文子는 不逞鮮人社에서 《太い鮮人》1․2호와 《現社會》3․4호를 발간하였고, 서상일 등이 흑우회 기관지로《民衆運動》을
Ⅰ. 서론
박은식과 장지연, 신채호는 애국계몽의 대표적인 사학자요 언론인들로서, 특히 박은식과 신채호는 소위한일합방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국사 편찬에 계속 정진하여 근대적인 민족사학의 초석을 놓은 존재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시기에 주로 발표되었던 이
민족(사학)의 등장 이전 상황
1910~1920년대의 조선에서는 일제의 식민통치로 인해 우리 민족의 말은 물론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대한제국 시기의 사서 또한 이미 식민사학에 오염되어 있었기에 이 시기에는 개인의 역사의식과 역사를 알고자 하는 지적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