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는 비좁게 되었다. 마침 제자인 사성(士誠) 정지헌(鄭芝軒, 1545-1607)선조께서 어린 나이[동몽童蒙]에 입학하게 되는 데 그 부친인 죽헌 정두 선조께서 서당 사정을 이해하고 퇴계선생을 존경하는 사은의 표시로 기숙사(역락서재)를 지어 드렸다. 그래서 일명 동몽재(童蒙齋)라고도 한다.
선생의 제자 정지헌(鄭芝軒)을 선생에게 취학시킬 때 지헌의 부친이 특별히 지어준 집으로 현판의 글씨는 퇴계선생의 친필이다.
역락(亦樂)의 뜻 -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불역락호(不亦樂乎)!` 즉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농운정사
농운정사는 도산서당 서쪽에 있는 8칸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1570년 퇴계선생이 돌아가시자 1572년에 선생의 위패를 상덕사(보물 제211호)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다. 2년 뒤 지방 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전교당(보물 제210호)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 1575년(선조 8)에 한석
퇴계는 이를 담당할 주체를 사림으로 보고, 이들의 습속을 바로 잡아 학문의 방향을 올바르게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서원의 독자적 역할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한 셈이다. 퇴계는 이같이 향교에 의한 관학 아카데미즘의 한계를 지적하고, 이후 도산서원을 비롯한 많은 서원설립을
독특한 마을 땅
풍천면의 서쪽 모퉁이에 낙동강 줄기가 태극 무늬처럼 휘몰아나가는 곳에 하회마을이 있다. 부용대에서 바라보면 마치 자루 달린 옛날 다리미 같다고 하여 '다리미형'이라고도 한다. 낙동강물이 S자형을 이루면서 마을을 싸고 돌아나가고 있다.
이 마을은 물길이 막혀 있고 외부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