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其三)」은 분노와 짙은 슬픔으로 감정의 격한이 문장 표면에 출렁이고 있지만, 회갑 때 쓴 이 글은 한중록 4편 중에서 문자 그대로 여유 있는 마음의 표현이다. 왕년의 설움은 잊을 수 없지만 현재의 왕모로서 지극한 요도와 영광을 누리고 있는 처지니 사위스러워서라도 옛 상처는 다칠새라 건드리
일기(燕行日記)』가 전하고 있으며 이 체험과 관련된 시조 1수도 발견되고 있어 흥미롭다. 이 세 작품의 실체를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해보도록 하겠다.
⒜ 봉황성(鳳凰城) 돌아들어 고향 어디메오./ 팔도하(八渡河) 가에 갈잎에 자리 보아/ 삼경(三更)에 겨우 든 잠을 여울 소리에 깨과라.
⒝ 난하(ଽ
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빈(惠嬪)의 호를 받았고, 갑신년(1764) 2월 20일 자신의 아들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로 들이는 처분이 내려진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宮號)도 혜경(惠慶)으로 올랐고, 1815년 12월 순조 15년에 8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서거한 후 이듬해에 헌경이라는 시호를 받고 사도
三五日, 毫不見效, 又攻了一二十日, 雖轟壞城堞數處, 仍被敵兵補好。
나공료삼오일 호불견효 우공료십이십일 수굉괴성첩수처 잉피적병보호
어찌 3,5일을 공격해도 조금도 효과가 보이지 않고 또 10-20일을 공격해도 비록 성가퀴 몇곳을 포격해도 적병이 잘 수리를 했다.
直至乾隆四十一年二月, 城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