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작인(鮑作人)’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많지 않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그 동안 해양문화에 대한 관심 부족과 사료부족이 첫 번째 원인인 것 같다. 게다가 그 동안 한국역사연구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중앙의 정치사와는 거리가 먼 주제였기 때문에 축적된 연구성과가 많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
포작인(鮑作人), 포작간(鮑作干), 포작한(鮑作漢), 복작간(鰒作干) 등으로 불렀다. 포작(鮑作)이라는 업에 종사하며 진상역을 담당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원래는 보자기(혹은 보재기)라고 부르는 것을 한자음을 빌려 포작이라고 쓰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어부면서 동시에 잠수사 역할을 하였
포작인의 삶의 행동양식에 들어 있는 적극성과 진취성을 들어 해민정신이라고 명명하게 된 것이다. 제주인의 진정한 정체성은 바로 바다를 개척한 포작인의 정신을 계승하자는 것이 요지인 듯하다.
해민(海民)에는 포작인, 잠녀까지 포함된다. 이들 해민들은 삶의 방편으로 해산물을 채취했다. 여기에
포식 건축양식은 고려 중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 간송미술관 소장 고려시대 금동삼존 불감에는 평방 없이 창방 위에 주간 포작이 사용되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 불화인 일본 서복사에 소장되어 있는 관경변상도에 나타난 불전도 어간에 있는 주간포작의 그림이 그 사실을 입증한다고 생
포작인’ 또는 ‘두무악’이라 불리며 일정한 거처없이 바다위에서 떠돌았다. 일부는 해안가나 강원도 같은 산지 등에 정착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해양유민의 사회사’는 드문드문 있는 ‘출륙유랑민’에 대한 역사기록을 모으고 모아 그들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제주의 지리적, 정치·경제·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