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국과 프랑스의 시대 배경
< 영 국 >
에드워드 1세기가 즉위했을 당시 노르만 족과 색슨 족은 서로의 관습을 존중하여 문화적으로 많이 융합된 상태였고, 시몽 드 몽포르 때부터 영어가 공문서에 사용되었다. 경제 부분에서 도시를 주목하면, 런던의 인구가 3만에 달하는 데에 비해 기타도시들은
영국의 농업과 플랑드르의 모방직에 관련된 공업은 상호 의존관계를 유지했으며 플랑드르의 백작 루이 드 네베르는 프랑스 왕실과 친분을 유지한데 반면 플랑드르의 도시상인과 시민들은 경제적인 이권 때문에 영국에 보다 우호적이었으며 특히 플랑드르 상인들은 에드워드 3세에게 프랑스와의 전쟁
전쟁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봉건사회에 큰 영향을 주어 중앙집권의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중세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발제문에서는 이러한 백년전쟁의 원인, 진행과정, 결과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2. 백년전쟁의 원인
① 영국왕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왕위 주장
백년전쟁은 1339년 플랑드르와 북(北)프랑스에서 양국군 사이의 사소한 다툼에서 비롯되었다. 1340년 영국 함대는 라인강의 하구에 있는 슬로이스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한 뒤, 1345년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맏아들인 흑태자(黑太子) 에드워드와 함께 노르망디에 상륙하였다. 이듬해 크레시전투에서 장궁
영국 왕이 젠트리 - 요먼 계급에게 다른 오락거리를 금지하는 대신에 활쏘기를 장려하여 상당히 많은 궁수대를 백년전쟁에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크레시와 푸아티에전투 당시 영국 장궁병들로 인해 프랑스군의 기사들은 돌격력이 떨어지게 되었고, 영국군에게 괴멸되게 된다. 이 패턴은 아쟁쿠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