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이며 친서유럽적인 시각을 견지한 것은 사실이고 이를 통해 서양사를 접하게 된 사람들은 중세의 기반이 되는 봉건제적 신분제와 기독교에 대해서 이국적이거나 낭만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확실히 이후의 평가에 있어서 저러한 기독교적인 입장에서의 위대한 인물들이나 기독
기독교 교리를 체계화시켰다.
410년, 게르만계의 고트족이 서로마로 유입해 들어오면서 서로마는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걷게 되는데, 이러한 서로마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고트족과의 협상을 통해 자신들이 실시하던 감독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면서 지역 내 영향력을 더욱 키워나갔다. 이러한
아리우스가 '하나님의 아들이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며 예수의 신성을 부정함으로써 발생한 논쟁이 갈수록 깊어져갔으나, 이 논쟁은 콘스탄티누스황제가 소집한 니케아 회의에서 일단락을 맺었다. 이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파는 유형당하고 삼위일체에 대한 정의와 부활절의 시기가 정해졌다.
로마의 화재를 들 수 있다. 64년에 로마에 큰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로마의 70%가 불에 탔다. 당시 로마의 혼란스러움으로 인해 백성들은 지도자들에 대해 이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으나 화재로 인해 지도자들에게 더욱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로마의 황제 네로는 자신의 권력을
대한 교황의 비난은 독일에서의 반란을 유발했다. 하인리히는 패배했고, 그는 1077년 2월 아우구스부르크에서 개최되는 독일 제후들의 한 의회(Diet) 앞에 출두하기로 약속했다. 교황이 그 제국 회의를 주재할 것이었고 독일 왕권의 미래는 거기에서 결정될 것이었다. 하인리히 4세는 그의 신민들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