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군함을 앞세우고 나타나 통상을 강요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결국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문호를 열게 되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1820년 영조의 고손자인 남연군 이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운 이하응은 1843년(헌종9) 흥선군에 봉해졌다.
8 . 1980년대
1980년대는 70년대에 이미 태동하기 시작한 민중 문학의 기운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문단의 큰 세력을 형성한 시대이다. 1980년대를 말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이 80년 5월에 있었던 광주 민주 항쟁이다. 70년대가 유신이라는 폭압과 독재 속에서 유지된 시대였고, 그 억압성은
강화도조약 때에는 개항불가론을 폈다. 또한 내부적으로 위정척사파와 개화파의 갈등으로 일본세력과 개화반대 등을 주장하는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위정척사파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반침략적 민족의식으로 의병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고, 이러한 의병운동은 농민운동과 위정척사사상의 영향을
중심의 차별적 사회 체제)
3. 임오군란 (1882)
① 원인 : 구식군대와 신식군대(별기군)의 차별에 대한 구식군인의 반발
② 전개 : 대원군의 일시적 재집권 ⟶ 청의 개입으로 실패 ⟶ 제물포 조약의 체결
③ 결과 : 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청 내정간섭 강화), 배상금 지불(박영효의 태극기 사용)
중심의 차별적 사회 체제)
3. 임오군란 (1882)
① 원인 : 구식군대와 신식군대(별기군)의 차별에 대한 구식군인의 반발
② 전개 : 대원군의 일시적 재집권 ⟶ 청의 개입으로 실패 ⟶ 제물포 조약의 체결
③ 결과 : 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청 내정간섭 강화), 배상금 지불(박영효의 태극기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