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시기에 고려 공산당에서의 활동 등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활동이 좌파적 색채를 극단적으로 띠지는 않았다는 평이다. 여운형이 일제 강점기에 한국독립을 위해 했던 여러 활동들은 해방 후 좌우합작노선 못지않게 일본 정계 인사들과의 회담, 소련, 중국 인사들과의 회담 등 그 폭이 다양했다
한국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여운형은 민족해방운동의 역량을 최대화하려면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합작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해방 후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들어와 있는 이상, 좌우합작만이 통일 민족국가를 가능케
운동총체를 살펴볼 수 있으며, 해방이후 정국의 모습에 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조선건국동맹의 여운형, 미국에서의 외교활동 중심의 이승만과 유격대 활동의 김일성과 통일전선운동의 김두봉의 다섯 명의 좌우 정치 지도자들을 살펴보고 좌우의 합작
좌우합작을 위한 좌우합작위원회가 발족되어 좌익을 대표하여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함으로써 공산당과 민족진영 양측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한편 조선인민당의 일부는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과 함께 3당통합에 합의하여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결성하였다. 이후 여운형은 자파 세력을 다시 규
한국민족이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한 조직적 활동에 충분한 능력을 발휘하였고, 그 성격이 자생적이고, 자주적이었다는 점이다. 건준은 일반국민의 요구에 부응하여 좌우 연합의 통일전선 세력으로 출발하였으나 각 세력의 정치적 위상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강대국의 한반도 분할정책을 돌파하지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