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을 이양하겠다는 정치 일정을 밝힌다. 따라서 임기를 결국 다 채우지 못한 채 최단 임기 대통령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최규하가 단독으로 출마하여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 공화당과 신민당의 당내 실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우선 공화당은 과도체제에는 정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정치 일정을 밝힌 바 있어 임기는 결국 다 채우지 못함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현행 헌법에 규정된 잔여 임기를 채우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 빠른 기간 내에 각계각층의 의견을 광범하게 들어서 헌법을 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선거를 실시하여야 한다…”
2. 최
김대중 후보의 승리로 최초의 여•야간 정권교체가 실현되면서 나흘 뒤인 12월 22일 김영삼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새로 등장한 김대중 정부 아래서 '5공신당' 창당 등 정치활동 재개 가능성으로 주목받고 있다. 화랑•충무•을지무공훈장, 월남엽성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정권의 유화책을 이끌어내어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후보가 1978년 12월 27일 형 집행면제로 석방된다. 그리고 1979년 5월 29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선명야당을 표방하는 김영삼 - 김대중의 연합세력이 신민당의 지도부로 나섬으로써 국민대중에게 큰 희망을 줌과 동시에 유신정권에게는 심각한 위기의
정치민주화, 사회민주화, 경제적 부의 균등을 바라게 되었다. 특히, 국민은 국민에 의해, 국민을 위한 진정한 민주정부의 탄생을 염원하였다. 이러한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신민당을 비롯한 야당과 재야 민주화 세력을 상징한 김대중이 차기정권을 잡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면서 민주진영의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