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군은 6·25 전쟁의 와중에서 급속히 성장하여, 50년 10만 규모에서 56년 70만 대군으로 변했다. 이러한 군부의 양적 팽창은 민간집단이 미성숙한 현실에서 자연히 사회적인 역할 팽창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양적 팽창보다도 정치적으로 더 큰 의미를 가진 것은 군부의 급속한 제도적, 기술적, 조직적
정치․사회적 불안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요인들이 쿠데타의 발발에 직접적인 이유를 제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한국 사회가 경험한 정치적 불안은 서구민주주의제도를 처음으로 운영하기 시작한 제3세계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겪는, 실질적으로
정치 개입을 촉발하는 동기로써 작용할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 대단한 설득력을 가지고 쿠데타에 대한 용인 내지는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군에 대해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흠결함’에 대한 선입관에도 일정 정도 기인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군부의 조
쿠데타를 모의하였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2군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8기생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사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전권을 장악하면서 군사혁명의 성공과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 군사정변은 초기
일으킨 것이다.’ 박정희는 스스로를 국민들을 구원하고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올바르게 일으켜 세우기 위해 적합한 영웅이라 자칭했다. 박정희의 쿠데타는 성공적이었고 미국의 묵인 하에 군사 쿠데타는 군사 ‘혁명’으로 격상될 수 있었다.
○ 5.16 군사 쿠데타와 박정희의 민정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