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 《안설 (按說)》 등의 저서를 남겼다. 사후에도 그의 문집과 저서는 간행되지 못하다가 1910년(융희 4년)에 가서야 간행되었다. 증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1761년 초, 요양차 북한산에 들어가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이때 삼국지, 수호전을 비롯한 중국의 고전, 일본의 서적
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 《안설 (按說)》 등의 저서를 남겼다. 사후에도 그의 문집과 저서는 간행되지 못하다가 1910년(융희 4년)에 가서야 간행되었다. 증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1761년 초, 요양차 북한산에 들어가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이때 삼국지, 수호전을 비롯한 중국의 고전, 일본의 서적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에서 논의된 전제개혁사상과 19세기 초의 실학자 정약용이 제기한 ‘여전제(閭田制)’등은 모두 토호 양반관료의 토지겸병을 방지하고 토지를 무토지 농민에게 분배함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사회적 여망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볼 때 17세기로부터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에서 논의된 전제개혁사상과 19세기 초의 실학자 정약용이 제기한 ‘여전제(閭田制)’등은 모두 토호 양반관료의 토지겸병을 방지하고 토지를 무토지 농민에게 분배함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사회적 여망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볼 때 17세기로부터
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안설 按說』 등을 남기게 되었다. 그가 남긴 저술 중에서 특히 『열하일기』와 위의 책들은 그가 추구하던 현실 개혁의 포부를 이론적으로 펼쳐 보인 작업의 하나이다.
특히『열하일기』에서 강조한 것은 당시 중국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청나라의 번창한 문물을 받아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