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와 구별되는 노래 (詩餘) 등으로 구분해서 설명하였다. 최승범, 「시조론」, 『국문학신강』, 새문사, 1988, 119면 재인용.
이렇게 시조라는 명칭이 생기기 이전에는 여러 단어들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는 고악에 대한 새로운 노래라는 뜻으로 쓰였다. 그러므로 시조만을 지칭한 것은 아니었다.
원리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한편, 현실고발과 풍자적 공격성 이 강화되면서 분량도 늘어나는 경향을 보였다.
한국 시가의 한 양식.〔개 요〕
고려 말에 발생하고 조선 초기 사대부계층에 의해 확고한 문학 양식으로 자리잡아 조선시대를 관통하며 지속적으로 전해 내려온 문학의 한 갈래이다. 4음 4
진면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 뒤 해방후에 양주동의 『여요전주』(을유문화사, 1947)에서 문헌 ․ 주석적 연구의 성과를 이루었고, 조윤제는『조선시가의 연구』에서 고려속요의 위상을 제시했으나 고려속요를 평민들의 문학으로만 취급함으로써 향유층의 범위를 축소하고 말았다.
한시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삼국시대 말기는 바로 육조말기와 육조의 시풍을 이은 초당 연간이다. 앞서 살폈듯이 한자는 보급되었지만 한시가 전혀 창작되지 않다가 이 시기에 이르러서 한시작품이 보이는 것은 바로 한시가 미미하지만 음악으로서의 성격에서 벗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 동
그 때까지의 한문시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시의 기원은 중국의 경우에도 정확히 밝혀내기 어려우며 우리나라에서도 정확히 언제 한시가 도입되어 창작되었는지 불분명하다. 다만 현전하고 있는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여수장우중문 시가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