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회담을 바라보는 시각은 국내정권 역시 미국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14년이라는 기간에 걸친 이승만, 박정희 정권 또한 주된 한일회담을 이끌어나가는 주된 배경은 한일 양국의 역사적 인식이 아닌 취약한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한 카드로 활용되었으며, 이는 곧 한국전쟁 후 미국과의
3) 경제 협력 협정한일기본조약과 함께 김종필과 오히라의 메모를 바탕으로 한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역시 조인되었다. 이 협정은 일본이 한국에 대해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를 10년에 걸쳐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일본은 이 조약을 체결하면
한일 관계는 과거 청산 문제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일제에 의한 35년간의 한국 강점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그에 대한 한일간의 청산이 광복이후 지금까지도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거 청산 문제는, 광복 이후 50년 이상이나 진척이 지지부
이승만 정권기(1950년대) 한미일관계
이승만은 북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각에서도 ‘미국의 앞잡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이승만이 미국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반공에게 격한 모습을 보인 건 사실이었으나, 미국을 위해 일하지 않았으며 오직 한국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미국의
회담 (1961.10.20∼1964.4)
시위 격화로 중단 but 한일회담이 가속도를 내게됨.
*김종필, 오히라 메모
●7차회담 (1964.12.3∼1965.6.22)
시이나 에쓰사부로 방한
서울에서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에 임시 조인함
→ 한일협정에 전기를 이룸.
1965년 6월 22일 이동원 외무장관과 시이나 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