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대훈, 모윤숙, 노천명 등과 친교했다. 해외 문학파의 후기 동인의 한 사람으로 동경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영미문학의 수입 소개에 노력을 기울이다가 1935년에 접어들어 본격적인 시를 발표하였는데 1938년 제 1시집인 『동경』이 간행된다.
36세 때인 1941년 2월 21일 수업 시간에는 창씨개명
함대훈, 모윤숙, 노천명 등과 사귀게 된다. 해외 문학파의 후기 동인의 한 사람으로 동경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영미문학의 수입 소개에 노력을 기울이다가 1935년에 접어들어 본격적인 시를 발표하였는데 1938년 제 1시집인 『동경』이 간행된다. 그러나 1941년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수업시간
함대훈, 모윤숙, 노천명 등과 친교를 맺었다. 1935년「시원」에 <고독>을 발표하였고, 첫시집 『동경』이 간행된다.
36세 때인 1941년 2월 21일 수업 시간에는 학생들에게 민족의식, 독립의욕을 고취시켰다는 죄목 당시 경성지방법원 예심계 조선총독부 판사 고토 모토지카과 서기 아오야아 아키아마데의
함대훈·모윤숙·노천명 등과 사귀었다. 1941년 2월 창씨개명을 공공연히 반대하는 등 반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3년 8개월 동안(1941~44)) 옥살이했다. 해방 후에는 민족주의 문학을 건설하기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는 데 참여했다. 1945년 중앙문화협회를 창립했고, 1946년 전조선문필가협회 총
함대훈, 모윤숙, 노천명 등 과 친교
1938년 그의 출세작으로 제1시집 「동경」에 실린 ‘고독’
1941년 36세 때 일제 말 창씨개명을 반대하고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 독립의욕 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구속된 후 3년 8개월의 옥살이를 마침
1946년 ‘조선 문화 건설 중앙 협의회’와 ‘프로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