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怡山김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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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산(怡山) 김광섭
1. 생애
이산 김광섭은 1905년 9월 22일 함북 경성군 어대진면 송신동 148번지에서 해산업을 하는 아버지 전주 김씨인 인준과 어머니 노옥동 사이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6세 때 북간도로 이주했으나 중국인의 행패가 심해 1년 만에 귀향,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경성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학, 12세에 졸업했다. 15세 때 서울 중앙고보에 입학했으나 1학기를 마치고 중퇴, 2학기에 중동 학교에 편입학하여 19세 되던 1924년 졸업했다. 이듬해 일본 나라(奈良) 의대에 색맹으로 불합격, 와세다 대학 제1 고등학원 영문과와 도쿄상대 예과에 합격했으나 영문과를 택하였다. 1927년 와세다 대학 조선인 동창회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의 청탁으로「R지」에 이란 민족주의적 습작시를 쓴 일이 있고, 「해외문학」(1927)과「문예월간」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27세 때인 1932년에 라는 논문으로 졸업했다. 재학 시에는 이헌구, 정인섭 등과 알게 되었고, 28세 때에는 귀국하여 중동학교 영어교사로 있으면서 동아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한편, 극예술연구회에 가담하여 서항석, 함대훈, 모윤숙, 노천명 등과 친교를 맺었다. 1935년「시원」에 을 발표하였고, 첫시집 『동경』이 간행된다.
36세 때인 1941년 2월 21일 수업 시간에는 학생들에게 민족의식, 독립의욕을 고취시켰다는 죄목 당시 경성지방법원 예심계 조선총독부 판사 고토 모토지카과 서기 아오야아 아키아마데의 서명으로 된 ‘심판결서’(1942. 5. 31)에는 ‘일찍부터 민족의식을 포회(抱懷), 조선 독립을 의도하여 오던바, 우교직(右敎職)을 이용하여 학생을 사주함으로써 소기의 목적 실현에 자(資) 할 것을 기도하고’, 일본의 조선인 차별 대우를 강조하였고, 조선어 과목 폐지로 인한 조선어 말살 정책에 반대했으며, 조선일보동아 일보의 폐간은 조선인을 문맹으로 만드는 제1보임을 학생들에게 역설선동, 치안 유지법을 위반하였음을 전문, 말문 및 전4개조에 걸쳐 기록하고 있음.
으로 일본 경찰에 의해 투옥, 수감되었다가 1944년 3년 8개월 만에 옥살이를 하면서『옥창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1949년 제2시집『마음』이 간행된 뒤, 1956년「자유문학」을 발행하고, 1957년 제3시집 『해바라기』를 발간하였다. 1964년「자유문학」지가 경영난으로 휴간되자 정신적 충격으로 고혈압 증세를 보였다. 이듬해 시인 설창수와 서울 운동장에서 야구 구경을 하다 졸도, 사경을 헤매다가 의식을 회복하여 투병하던 중 1969년 제4시집『성북동 비둘기』와『나의 옥중기』가 발간되고, 42년간 고락을 같이 한 부인이 사망한 1971년 사회 시집 『반응』을 내었다. 그는 놀라운 투병 생활 13년만인 1977년 서울 중화동에서 세상을 떴다.
이산의 사회 활동상은 다양하고 화려하다. 해방과 더불어 좌익 단체인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1946. 8. 16. 결성, 임화 중심)와 ‘프로예술연맹’(이기영 중심) 들에 대결하고자 ‘조선문화협회’를 1946년 9월 8일에 발족시켰고, 자금사무실 등 여건을 마련한 다음 9월 18일에는 ‘중앙문화협회’(적선동 소재)로 이름을 고쳐 창립하는 데 동참했다. 창립 멤버는 변영로, 오상순, 박종화, 김영랑, 이하운, 김광섭, 오종식, 김보섭, 이헌구, 양주동, 서항석, 김환기, 안석주, 허영호, 심재홍, 유치진, 서원출, 이선근, 오시영, 조희순 등임.
이후 광산업도 했고, 조선문필가협회 총무부장, 민주일보사 사회부장, 전국문화단체 총연합회 출판부장, 민중일보 편집부장, 미군정청 공보부장, 대통령 공보 비서관, 대한신문, 세계일보,「자유문학」사장,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및 부위원장, 한국 자유문학자협회 위원장, 한국문인협회 발기준비위원, 경희대 교수를 지냈다.
김광섭은 그의 산문에서 피력한 바와 같이 일관성 있게 살았던 의로운 사람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친구들에게 성격이 깐깐하다는 평도 들은 적이 있으나, 그런 이산의 성격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고독’하기는 하여도 일관성 있게 지조를 지키며 살 수 있게 하였을 것이다.
2. 작품세계
김광섭의 시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일반적으로 세 시기로 구분하는 연구자들이 많다. 첫째는 1933년부터 1940년까지 첫 시집『동경』을 간행한 때를 전후한 시기로 시의 내용이 대체적으로 신변적이고 추상적일 뿐 아니라 그가 즐겨 쓰는 시어도 부드럽지 못하고 딱딱한 관념어를 많이 사용한 시기였다.
두 번째 시기는 1941년부터 1964년까지로 제2시집『마음』과 제3시집『해바라기』를 펴낸 때를 말하며 ‘벽’, ‘창’ 등의 이미지로 갇혀있는 의식과 불안, 그리고 한편으로는 해방의 기쁨 등이 동시에 나타난다. 특히『해바라기』는 민족의식과 조국애가 확대된 시편들로 꾸며져 있어 그의 높은 이념을 ‘해’로서 상징하고 민족의 나아갈 지표를 제시하고 있다.
세 번째 시기는 1965년부터 1977년까지로『성북동 비둘기』와『반응』이 포함된다. 이 때는 폐쇄적이며 내향적인 시를 쓰던 그가 인생을 달관하고 고통과 병을 받아들여 자연과 삶, 그리고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시를 쓴 시기였다.
참고문헌
※ 참고문헌
김봉군 외(2007), 한국현대작가론, 민지사
문덕수 외(2000), 한국현대시인연구, 푸른사상
신용협(2001), 현대 대표시 연구, 새미
박근영(1955), ‘이산 김광섭론’, 인문과학연구
신정아(2004), ‘김광섭의 시집『성북동 비둘기』연구’, 충북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이상욱(1991), ‘김광섭 초기시의 현실인식과 저항의식’, 청람어문학
장은영(2003), ‘김광섭시에 나타난 생명중심적 시의식 연구’, 고황논집
정은경(1999), ‘이산 김광섭 시 연구’, 어문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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