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이 왕건이나 이성계를 들지 않고, 견훤이나 궁예를 든 것은 그의 혁명적 사상과 한계를 함께 보이는 대목이다. 견훤이나 궁예는 어지러운 세상에 원한을 품고 봉기한 인물이면서도, 역사의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한 호민이었기 때문이다.
‘호민’이란 전부터 있어온 말로, 세력이 있는 백성을 뜻
사상가였던 만큼 사상의 어느 한쪽만을 따로 떼어서 그의 온전한 모습을 보이기는 어렵다. 그는 유교의 바탕에서 자라고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불교와 도교와 서학이며 민간신앙에까지 두로 모두 관련했다. 시쳇말로 한다면 그는 일종의 종교 다원주의자였고, 특히 뛰어난 시인으로 그의 문학사상에서
허균의 사상과 문학허균은 자신과 세상의 관계를 ‘불여세합(不與世合)’, 즉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다." 고 하였다. 이때의 '세상'은 기존의 완고한 중세적 질서를 말한다. 그는 벼슬살이에서 여섯 번의 파직과 세 번의 유배를 겪었다. 이는 그가 얼마나 순탄하지 못한 세상살이를 했는지 짐작케
허균은 시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학식이 풍부하였다. 아버지 초당 허엽은 서경덕의 학통을 이어 받았으며, 형들인 허성․허봉도 유명한 학자이자 문인들이었다. 누이인 허난설헌은 시에 능통한 여류시인이었다. 이러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허균은 어려서부터 문학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
1. 허균의 삶과 철학
조선 중엽 강릉에서 태어난 허균은 혼란한 시대에 잦은 국난과 외침, 파쟁에 시달리면서도 부패하여 무너져 가는 나라를 걱정하면서 새로운 이념을 제시하였는데,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유교사회 하에서도 불교와 도교, 천주교 심지어 민속종교를 넘나드는 사상의 자유로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