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도학은 조선시대를 일관하게 지배해 왔던 이념적 기반이었으므로, 19세기 후반 조선왕조 말기의 급박한 역사적 상황에 당면하자, 화서 이항로를 선두로 하여 전국적으로 산림(山林)의 도학자들이 일어나 새로운 각성으로 침체하였던 도학정신에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하였다.
Ⅰ. 들어가며
화서에게 있어 중화는 하나의 유토피아였다. 중화와 이적의 엄격한 구분을 바탕으로 중화라는 유토피아와 아닌 곳을 구분하였고 이에 따라 소중화인 조선은 자체를 유지하는 것만이 유토피아를 지속시키는 것이라 본 듯 하다. 그러나 화서가 생각하였던 소중화, 즉 조선이라는 19세기의
Ⅳ. 화서 이항로의 철학사상
조선 후기에는 외형적으로 도학(주자학)의 정통이 유지되었으나, 이미 다양한 사상조류의 등장과 도전으로 사상적 다원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한말의 시기인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조선사회는 한층 더 격심한 사회적 혼란과 사상적 동요를 겪어야 했다. 이에 따라
19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조선조의 정치체제는 대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면서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삼정(三政)의 문란과 이에 따른 정치체제의 내재적 모순이 심화되고 이에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나면서, 조선조의
1. 서세동점의 시대 상황
조선시대 후기 17~18세기에 이르러 도학자들이 성리학의 개념 논쟁에 몰두하다 관념 속에 빠져들게 되자 이에 대한 비판으로 실학파가 대두하여 활발히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부터 서양문물과 천주교 신앙이 전개되어 18세기 말부터 유교이념하의 조선 사회에 커다란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