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비판으로 실학파가 대두하여 활발히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부터 서양문물과 천주교 신앙이 전개되어 18세기 말부터 유교이념하의 조선 사회에 커다란 물의를 일으키게 된다. 서학의 유입 초기에는 과학문물은 수용하되 종교만 비판하는 경향을 보였으나 정조 시대 이후의 반유교적 전파단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도학은 조선시대를 일관하게 지배해 왔던 이념적 기반이었으므로, 19세기 후반 조선왕조 말기의 급박한 역사적 상황에 당면하자, 화서이항로를 선두로 하여 전국적으로 산림(山林)의 도학자들이 일어나 새로운 각성으로 침체하였던 도학정신에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하였다.
조선이 겪게 되는 국가적 비애와 민중의 고초는 근대화의 발전적 수용을 추진해야했던 시기에 현상유지와 쇄국체제만을 고수함으로써 생겨난 불행한 구한말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조선의 쇄국체제를 사상적으로 이끌었던 중심에는 화서이항로가 있다. 여기서는 화서의 위정척사론과 정치사상에 대
서양 열강의 중국 침략 등으로 외세에 대한 위기감과 서학(西學)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었다. 또한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예언서가 널리 유포되며 미륵신앙, 도참사상 등 다양한 형태의 반봉건적 민중사상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제우는 유(儒)ㆍ불(佛)ㆍ선(仙)과 같은 기존의 사
조선조의 정치체제는 세도정치(勢道政治)로 변질되었고 체제의 안정이 급속하게 와해되어 갔다. 이와 같이 내부적으로 분해과정을 걷고 있던 조선조 정치체제를 향하여 또 하나의 심각한 도전이 외부로부터 오게 되었으니 그것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동아시아 압도적으로 밀어닥친 서양세력과 그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