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리’, ‘교활리’라는 별칭까지 얻게 되었다.
결국 향리는 중앙정부의 견제로 계층이 하강했지만, 피지배층인 농민들과는 대립하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향리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기능도, 피지배층을 대변하며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는 주동적인 세력으로 변모하기에도 굉장히
학설을 배우고 공자의 사상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가의 예절이 번쇄하다는 것과, 장례를 너무 지나치게 성대하게 치르고, 상복을 너무 오랫동안 입어 백성들의 재물과 생명을 해치게 하는 등의 폐단을 보고 유가를 반대하는 주장을 펴게 됨.
제자-활리, 수소, 호비,이지, 송연
묵자 학설의 연원
불합리하여 이를 개선하기 위함.
1301년에 설치되었다. 즉, 원나라 정동행성평장사(征東行省平章事) 활리길사(里吉思)가 소유하였던 노비를 추쇄, 환본하고자 설치되었다.
(3) 공민왕과 신돈 때의 목적: 국가의 개혁정책에 부응하여 당시 혼란의 극을 달리던 토지와 노비제도를 과감히 정리하고자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