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위원회의 당비서가 되면서 그는 기술자에서 당료로 변신했다. 성 건설위원회의 당비서라면 부청장(副廳長)급의 관리였다. 1981년에는 공산주의 청년단(共靑團) 활동을 시작, 공청단 깐수성 공청단 서기가 됐는데 이것이 후진타오가 수력발전 기술자에서 국가 지도자로 변신하는 계기가 됐다.
중국의 순항에 암초로 작용하면서, 사회적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중국의 성장에 큰 걸림돌이 될 것임이 명약관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서 5개년 계획에서 후진타오 정부는 성장뿐만 아니라 균형에도 힘을 쏟는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 물론 중국이 지금까지와 같은
후진타오의 중국 정계 내 위상은황태자라는 표현으로 비유돼왔다. 16대 이전 후진타오가 맡았던 직책을 보면 이는 단순한 비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부통령격인 국가 부주석 직책 외에, 중국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7인으로 구성된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서열 5위의
국가주석, 국무원, 총리에게 안배한 집단지도체제로 운영하지만 장쩌민 이후 중국의 국가주석과 당 총서기는 겸임되는 경우가 있다. 원칙상, 국가주석은 대외적으로 중국을 대표하고 주요 정책결정권, 인사권 및 군 통수권이 없는 명목상의 국가원수일 뿐이나 중국의 현 국가주석인 후진타오는 2002년
중국은 아프리카와 티베트의 자원을 ‘싹쓸이’하려는 의도로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투자의 위험도나 환경 파괴 등도 고려하지 않고 무차별로 진출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게다가 중국은 인권 탄압이나 독재로 낙인찍힌 국가들과도 철저하게 ‘정치적 조건’을 달지 않고 실리 차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