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점은 오랫동안 세종의 숙원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은 자신 스스로 뛰어난 언어학자였고 그렇기에 발음과 글자의 연관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말을 나타내는 한자로는 우리의 말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훈민정음이 외국어(한자
수 없었다.)
(4)창제의 목적
① 자주, 애민, 실용정신
② 국어의 전면적 표기(고유어, 한자어, 외래어 포함)
1.2 제자원리 및 글자체계
(1)초성 17자(+전탁 6자)
①원리: 훈민정음의 자음은 먼저 발음 기관을 상형하여 기본자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글자들을 만들어 나갔다. 가획은
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으로 현재 간송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예의(例義)’, ‘해례(解例)’, ‘정인지 서 (鄭鱗趾 序)’의 3부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실록본 : 세종실록(28년 9월조)에 ‘예의’외 ‘정인지 서’ 수록.
(2) 언해본
-희방사본(喜方寺本) : 일명 월인석보본(月印
원칙이다.③향찰은 음절구조가 복잡하여 국어를 만족스럽게 표기하지 못했다.
(3) 훈민정음(訓民正音)①훈민정음은 세종 25년에 창제하고, 세종 28년에 반포된 독창성과 과학성을 가진 문자이다.②그러나 이 문자가 온 국민의 문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한 것은 19세기와 20세기의 교체기이다.
세종에 반대한 최만리 등은 상소를 통해 훈민정음의 창제는 중화주의에 어긋난다고 했으니, 바꾸어 말하면 훈민정음창제 그 자체는 문화적 자주정신이 바탕이 된 민족주의이다.
곧 이어 세종 임금은 '그러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려고 해도 제 뜻을 펼칠 수 없는 사람이 많으므로' 새 글자를 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