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극대극 논변이 조선유학사상 제일 먼저 있었던 주요한 논쟁이고 수준 높은 학문적 성과였음에도 불구하고 회재의 실력은 당시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회재의 행장을 지은 퇴계 선생도 회재의 생존 시에는 그를 우러러 보지 않았으나, 회재의 卒後에 아들이 행장의 제작을 부탁하면서 遺著와 事
Ⅰ. 개요
고대 사회의 하늘에 대한 경험은 하늘을 향한 구체적인 몸짓으로 표현되었다. 제천(祭天), 일명 국중대회(國中大會)라 하여 온 천하가 하나가 되어 집단가무를 즐기며 희생제물을 하늘에 바치기도 하고, 각 부락에서 천군이라 불리는 사람이 제천의식을 집례하면서 그 징표로 솟대를 세우기
세계관의 차이인 셈이다. 조한보는 `무극이태극`을 해설하여 태극이 바로 무극이라고 하면서 무극과 태극을 유무와 내외로 나눌 수 없다고 보았다. 또 `무극이태극`은 큰 근본이자 통달한 도로서 나눌 수 없는 한 덩어리이기 때문에, 그 근본만 깨달으면 모든 사물의 이치를 다 갖추게 된다고 하였다.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에서 무극이라는 표현의 필요성 여부 문제, 셋째 극(極)의 개념 문제, 넷째 태극도설의 연원문제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주돈이의 저작 여부문제를 보면 육구연의 형 육구소의 견해에 바탕을 두고 주돈이가 저자가 아님을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태극도설은 주돈이의 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