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위원회의 당비서가 되면서 그는 기술자에서 당료로 변신했다. 성 건설위원회의 당비서라면 부청장(副廳長)급의 관리였다. 1981년에는 공산주의 청년단(共靑團) 활동을 시작, 공청단 깐수성 공청단 서기가 됐는데 이것이 후진타오가 수력발전 기술자에서 국가 지도자로 변신하는 계기가 됐다.
후진타오 정부는 성장뿐만 아니라 균형에도 힘을 쏟는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 물론 중국이 지금까지와 같은 평균 8~9%의 초고속성장을 계속적으로 이뤄낸다면 수면 위로 떠오른 사회문제들을 어느 정도는 잠재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정부나 국민의 열망이 경제성장에만 초점이 맞춰진다면 사회문
국가주석, 국무원, 총리에게 안배한 집단지도체제로 운영하지만 장쩌민 이후 중국의 국가주석과 당 총서기는 겸임되는 경우가 있다. 원칙상, 국가주석은 대외적으로 중국을 대표하고 주요 정책결정권, 인사권 및 군 통수권이 없는 명목상의 국가원수일 뿐이나 중국의 현 국가주석인 후진타오는 2002년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함께 하는 만찬에 초대를 받았다. 후진타오국가주석은 1995년 장쩌민 전 국가주석의 방문 이후 10년 만에 이뤄지는 중국 정상 방한으로 눈길을 끌고 있다.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가수 보아 역시 이번 APEC 회의에서 톡톡히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
후진타오국가주석은 세 번째 정상회담에서 2010년 양국 간 교역규모 목표치를 2000억 달러로 앞당기는 데 합의 하였다. 5년 전 2012년에 달성하기로 하였던 목표치를 무려 2년이나 단축시킨 것이다. 금년에도 우리의 대중교역은 일부 언론의 우려와 달리 좋은 실적을 내고 있다. 7월까지 대중수출증가율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