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농기구 발달에 따른 농업기술의 발전
민성기는 쟁기의 연구에서 쟁기의 변천을 고찰하여 조선초기에 볏이 없는 ‘보’쟁기에서 조선후기 볏이있는 ‘장기’로 전환하여 이것이 토지비옥도의 증대를 가져와 2년 4작 2년 4작이라는 전지이용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장기
쟁기가 만들어 놓은 이랑에 의해 너비가 좁고 길쭉한(장방형) 지조(strip) 중세 유럽에서 장원의 경작지를 분할하는 최소 기본 단위.
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각 가구는 각 경지에 여러 지조를 보유하였다. 반면 르와르강 이남의 프랑스 지역과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는 대개 촌락의 경작지가 거의 정방형
쟁기, 호미, 괭이, 낫, 지게와 수레 등으로 논밭을 갈고 흙을 파거나 고르는 데에 이용을 하였다. 즉 이러한 조선 후기의 이앙법의 도입은 일부 자영농이 임노동자로 전략하는데 기여를 하였으며 수리 시설의 확충과 벼농사에 이모작이 가능했으며 보리 등을 이랑에 심는 방식의 확산이 이루어졌다.
쟁기를 그는 인력경이 갈이작업에 이용되었을 것이다. 강원도안변군용성리 횡혈식석실분에서 발견된 보습은 소와 쇠보습을 갖추지 못한 농민들이 6세기에도 인력경을 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경은 개간을 촉진시켰고 深耕이 가능해져 잡초와 병충해 제거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고랑과 이랑의 간
이랑에 용의 이빨을 뿌리자, 흙 속에서 무장한 병사들이 솟아나옴.
이아손은 돌멩이 하나를 병사들 사이에 던짐.
병사들끼리 싸우다가 마침내 모두 전멸
세이렌
노래를 불러 선원들을 유혹하여 바다에 빠지게 하는 님프.
아르곤 원정대는 이올코스로 돌아가는 길에 세이렌을 만남.
오르페우스의
쟁기질을 재운 것이다. 논이고 밭이고 갈기를 열 번이나 하여 깊숙이 흙을 일으키니 다른 농부에 비할 바 아니었다. 밭에는 담배모를 옮겨심기 위해서 거름을 두껍게 깔고서 이랑 위에 무수히 구멍을 뚫고 비오기를 기다렸다. 한편 가뭄이 들어 담배 모종이 시들까 염려하여 이른봄에 길게 가자를 매고
이랑, 두 이랑 밭이랑을 만들고 김을 매며 부르던 농요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밀양 아리랑, 정선 아리랑 등과 같이 자기 고장의 향수와 특색을 살려서 가사를 짓고, 곡을 만들어 불렸던 것이다. 더욱이 아리랑의 가락은 슬플 때 부르면 슬픔을 달래고, 고독하고 피로에 지쳤을 때 부르면 고독을
쟁기질을 하는 자, 혹은 삼중전사(三重戰士)라는 뜻으로 곡식의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세 가지 힘든 일을 싸움에 견준 것으로 보여짐.
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소년에게 쟁기 쓰는 법, 씨 뿌리는 법, 그리고 곡물이나 농업에 대한 지식을 가르쳤습니다. 트리프톨레모스는 엘레우시스 땅
(1) 갈이농기구
3. 쇠스랑(이성산내저수지)
땅을 파헤쳐 고르거나 두엄·풀무덤 등을 쳐내는 데 쓰는
갈퀴 모양
4. 쟁기
땅을 가는데 사용하는 연장으로 흙을 일구어 뒤집는 보습볏을 지탱하는 숱과 연장을 부리는 자부지
술을 견인력과 연결하는 성에
술과 성에를 고정하는 갈이, 깊이를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