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문화 논쟁

 1  동서 문화 논쟁 -1
 2  동서 문화 논쟁 -2
 3  동서 문화 논쟁 -3
 4  동서 문화 논쟁 -4
 5  동서 문화 논쟁 -5
 6  동서 문화 논쟁 -6
 7  동서 문화 논쟁 -7
 8  동서 문화 논쟁 -8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동서 문화 논쟁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동서 문화 논쟁
1. 양수명의 현대 신유학이 갖는 의미
1) 양수명은 웅십력과 함께 현대신유학의 창시자 내지 제1세대로 평가된다. 그는 중국현대철학사에서 차지한 학문적 위상과 영향력뿐아니라, 거의 1세기에 걸친 극적인 삶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나아가 존경의 대상이 된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중학 졸업의 학력으로 북경대학총장 채원배의 초빙을 받아 25세에 북경대학에서 강의하기 시작하였으나, 사회운동에 종사하기 위해 1924년 여름7년만에 교수직을 사임하였다. 전통적유자의 이상에 따라, 이론의 영역에 머물며 강단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철학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과 맞부딪친 실천적 지식인이라는 점에서 , 앨리토는 양수명을 ‘최후의 유자’(the last Confucian)라 불렀다.
‘동서문화와 철학’은 양수명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으로, 현대신유학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문화보수주의로 현대신유학의 학문적 정체성을 정립한 선구적인 저술이다. 이 책의 출간으로 야수명은 일약 중국사상계의 유명인사가 되고(심지어 언론에서 당시 사회의 10대명사로 꼽을 정도였다), 전국 각지에서 강연요청이 쇄도하였다. 동서문화와 철학은 우선 근현대 중국사상계에서 동서문화에 대한 이전의 단편적이고 일면적인 고찰을 뛰어넘어, 체계적인 비교연구를 수행한 저술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나아가 중국적 전통 안에서 성장한 세대의 서양문화에 대한 인식과 대처방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중체서용론적인 편의주의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을 넘어서 나름대로 객관적인 접근을 기도하였다는 점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참고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5.4운동 이래 서양문화 우월론에 기초한 전반서화론全般西化論이 일세를 풍미하는 가운데, 문화의 민족성과 중국문화, 특히 유학의 보편적 가치를 주장한 문화보수주이적 입장을 본격적으로 제기 하였다. 따라서 양수명이 현대신유학의 기본적인 문제의식과 해결방향을 제시하였다는 평가는 주로 이 책에 근거한다. 이점에서 이책은 현대신유학의 선구이자 고전이라 할 만하다.
이 책은 원래 저자가 1921년 8월 산동 제남濟南에서 행한 강연기록을 바탕으로, 1920년 북경대학에서 행한 강연기록을 참고하여 편찬된 것이다.
2) 동아시아 사회가 19세기 서구열강의 동아시아 진출, 이른바 서세동점이래 부딪친 문제는 한마디로 ‘전통과 현대’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세계사의 보편적인 단계로 자신의 위상을 정립해가는 현대, 그것과는 이질적인 전통에 살고 있는 동아시아인들이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할 것인가 라는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우선 이질적인 타자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하는 인식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 문제에 있어 양수명의 현대신유학이 지니는 의의는 기존의 중체서용론적 인식틀을 벗어나 개방적인 지평 위에서 자신과 타자, 즉 동서 문화를 인식하였다는 사실이다. 중체서용론은 중화적 세계관에 갇혀 자신을 대상화해서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기존 권력관계를 유지하는 틀 안에서 어떻게 저항 없이 서구문화를 수용할 것인가라는 차원에서 문제에 접근하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양수명은 그런 한계를 넘어서 동서 문화를 세계사 내지 인류문화라는 보편적인 차원에서 나름대로 객관적인 비교연구를 수행하고자 하였다.
인식의 문제는 인식 주체가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질적인 타자를 어떻게 받아 들일 것인가 하는 수용의 문제과 연결된다. 사실상 서구문명의 산물인 현대는 근본적으로 동아시아의 전통과 이질적인데, 그렇다면 그 이질적인 현대를 전통에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이전 단계에서는 현대의 우월성을 인정한 위에서 기술이든 사회정치체제이든 아니면 문화이든 유용하고 필요하므로 수용하자는 입장에 불과 하였다. 양수명은 이질적인 타자의 수용에 있어서 주체의 문제에 주목한다. 객관적인 고찰에서 인식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우리이고 (즉 저들과는 근본적으로 이질적이고), 따라서 저들이 우월하다고 해서 우리를 버리고 저들을 좇을 수 있는 것인지 우리 자신을 면밀히 검토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의 장점은 취하고 우리의 단점은 버리자는 식의 안이하고 도식적인 조화론 혹은 절충론을 배격하고, 장기간에 걸쳐 민족을 지탱시켜온 전통문화의 생명력안에서 그것을 수용하고 배양해낼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3) 객관적이고 실사구시적 관점에서 세계문화를 고찰한 결과, 그는 이른바 문화삼로향설文化三路向說이라는 문화유형론을 건립하고 그것에 의거하여 중서中西문화를 평가하고 장차 취해야 할 노선을 결정했다고 자처 한다.
4) 양수명이 감당하려고 했던 ‘전통과 현대’라는 문제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의미하고 아직 해결을 기다리고 있는 과제다. 그가 현대의 지표로 인식한 과학(기술)과 민주주의가 아직 동아시아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고, 그래서 20세기초에 행한 양수명의 현실에 대한 관찰과 분석은 21세기에 갓 들어선 오늘날에도 섬뜩하리만치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더욱이 근자에 아시아의 경제위기 이후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재검토의 분위기는 현대로 포장된 서구적 가치에 대한 새삼스런 선망과 함께 반성적 검토를 요구하는 것 같다. 상당히 오래 전부터 탈현대(Post Modern)를 논하고 있는 현실이지만, 동아시아 사회가 여전히 전통과 현대를 해결해야 할 문제로 안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양수명과 그의 현대신유학의 현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역자 강중기-
2. 1929년 양수명의 8판 머리말 - 자기반성
참고문헌
참고자료
양수명梁漱溟 연보 (1893~1988)
1893년 : 10월18일 북경에서 아버지 양제梁濟와 어머지 張씨 사이에서 2남2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남. 아명은 환정煥鼎, 자는 수명壽銘. 원적은 廣西 桂林인데, 증조때에 북경으로 이주.
1898년(6세) : 글공부 시작. 아버지가 훈장을 초빙하여 을 가르치게 하였고 사서오경대신에 세계대서를 소개하는 인문지리서인을 읽도록 함.
1899년(7세) : 中西小學堂에 입학. 신식학교로서 중국어와 영어를 함께 가르침.
1901년(9세) : 남횡가(南橫街) 公立小學堂에 입학.
1902년(10세) : 북경몽양학당(北京蒙養學堂)으로 전학. 전통학문과 서양학문을 함께 가르치는 남녀공학의 신식학교. 양수명은 이 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면서 독학하는 습관을 기름.
1906년(14세): 북경순천중학당(北京順天中學堂)에 입학하여 5년 반 동안 수학하였다. 독학으로 중국과 서양의 많은 정치적 서적을 섭렵함. 유신사상이 싹트고 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구국구세(救國救世)’의 뜻을 세움.
1911년(19세): 상반기에 유신에서 혁명으로 전환하여 경진동맹회(京津同盟會)에 가입. 겨울에 중학을 졸업하고 ‘민국보(民國報)’기자가 됨.
1912년(20세): 민국보의 기자로 활동하며 의회에 출입하고 정치지도자들을 접하면서 사회의 지도적 인물들과 정치권력에 대한 회의를 품게됨.
1913년(21세): 민국보가 국민당 본부 기관보로 개편되어 민국보에서 떠남. 를 읽고 사회주의 사조에 심취하여 ‘사유재산’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이라는 소책자 저술. 곧 사회주의 버리고 불교에 잠심. 불교에 대한 신심이 돈독하여 종신토록 ‘채식하고 결혼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고, 두 차례 자살 시도. 어머니 병사.
1915년(23세) : 불경연구 계속하여 [갑인甲寅]잡지에 를 발표. 를 지음.
1916(24세) : 사법총장 장요증(張耀曾)의 비서에 임명. 동방잡지에 을 연재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음. 이 글을 가지고 채원배(蔡元培)를 방문하여 깊은 인상을 남기고 이를 계기로 북경대학 교수로 초빙됨.
1917년(25세) : 장요증이 사직하자 비서직 그만두고 북경대학에 정식으로 부임. 인도철학 강의하고 저술.
1918년(26세) : 인도철학을 계속하는 한편, 유학연구를 시작.
1919년(27세) : 웅십력(熊十力)이 편지를 보내 을 읽은 소감을 밝히고 불학에 대한 토론을 제의하여 교류시작.
1920년(28세) : 소년중국학회의 요청에 응하여 ‘종교문제’를 강연하고, 강연원고 ‘종교문제’를 소년중국에 발표함. 북경대학에서 과외에 ‘동서문화와 철학(東西文化及其哲學)’ 강연 시작하여 동방문화파의 대표자로 부상.
1921년(29세) :산동성교육청의 요청에 의해 ‘동서문화와 철학’을 강연. 친구 오용백(伍庸伯)의 처제 황정현(黃靖賢)과 결혼. 을 상무인서관에서 정식으로 출판함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전국적인 명성을 획득.
1924년(32세): 7년간의 교수생활 마감. 교수직 사임 후 산동에 가서 조주육중 고중부를 시험 운영함.
1930년(38세) : 하남촌치학원을 열고 ‘촌치자치조직’등의 강좌를 맡음. 북경대학, 연경대학의 요청에 응해 ‘중국문제의 해결’에 대하여 강연. 계속 강연하면서 향촌문제에 대해 연구,강연하고 책을 저술함.
1933년(41세) : 교육부가 양수명과 유영건등에게 ‘교육체계에서 민중교육의 지위’를 초안하도록 함.
1943년(51세) : 계림에서 집필을 계속함.
1946년(54세) : 정치협상회의에 민맹 9인 대표가운데 한사람으로 참석. 모택동 등 중공지도자들과 수차레 걸쳐 중국의 출로 문제에 대하여 토론하며 통일 정부의 건립과 농공업의 균형적 발전을 강조하고 다당정치와 일당전제에 반대하는 ‘중간노선’을 주장.
1951년(59세) : 토지개혁사업에 참가하고, 광명일보에 글을 써서 자신이 계급투쟁, 무장투쟁 등의 문제에서 전후로 새로운 인식과 각오가 있었음을 밝힘.
1952년(60세) : 글을 써서 이전의 과오에 대해 자아비판. ‘나의 노력과 반성’을 써서 수년에 걸친 자신의 ‘개량주의’노선을 반성하고 자신이 처음으로 마르크스의 논저를 읽은 소감을 서술.
1953년(61세) : ‘과도시기 총노선’에 대해 토론할 때 농촌사업에 대해 의견을 발표하는데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에 ‘구천구지(九天九地)’의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여 모택동과 대립함으로 모의 격분을 야기, 혹독한 비판 받음.
1955년(63세) : 제 1집이 출간. 풍우란, 천가구, 임계유등의 글 14편이 실림. 양수명은 마르크스, 레닌의 저작 및 정간물을 열독하고 여전히 정협회의에 출석함.
1957년(65세) : 양수명에 대한 비판이 더욱 심화되어 제 2집이 출간되고 비판서들이 출판되지만 양수명은 한마디도 발언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지 않음.
1958년(66세) : 대약진운동, 인민공사운동이 전개, 이로 기뻐하며 광서 각지에 민족단결호소하고 광서장족자치구의 건립 촉구.
1970년(78세):‘오십년 당사의 학습에서얻은 감상과 인식’을 써서 변증법적유물론을 칭송함.
1974년(82세) : 중국문화사에서 공자 및 유학의 지위와 영향을 밝히고 공자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비판하고 중국 전통문화의 부정에 반대함. 이 때문에 19개월에 걸쳐 비판을 받았지만, 마지막까지 “ 삼군으로부터 장수를 탈취할 수는 있지만 필부의 굳센 뜻을 빼앗을 수는 없다.” 라고 하여 자신의 입장 견지함.
1975년(83세) : 의 집필을 완료하고 이어서 의 집필에 착수하여 공자의 정신을 재삼 칭송하고 자각과 이성에 기초한 인생향상을 강조하는 입장 견지.
1980년(88세) : 미국 시카고 대학 사학과 교수 앨리토가 방문하여 14일간 대화를 나눔. 전국 정협상무위원과 헌법수개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어 헌법수정작업에 참가함.
1984년(92세) : 북대 교수 장대년, 풍우란, 탕일개 등이 중국 문화서원의 창립을 발기, 요청에 응하여 창립에 참여하고 원무위원회 주석, 학술위원회 위원, 발전기금회 주석을 맡음.
1986년(94세) : ‘중국문화강습반’에서 중서 문화 비교연구에 대해 강연하면서, 마지막에 “나는 60여년전에 중국문화가 장차 반드시 부흥하리라 예측했다.”라고 함.
1987년(95세) : 수명이 북경대학 부임한지 70주년이자 수명의 95회 생일을 기념하여 중국문화서원이 발기해서 “양수명 강의, 연구 70주년 기념 국제학술토론회”가 북경 이칠극장에서 개최됨. 국내외 전문학자들이 참석하여 수명의 학술사상에 대해 토론하고 그 학술정신과 인품에 대해 칭송하였고, 수명은 토론회에 참가하여 답사하였는데 그것이 공식석상에서 마지막 발언이었음.
1988년(96세) : 계속적으로 강연하고 책을 저술하며 생을 보내다가 6월 세상을 떠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