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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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영국의 역사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영국의 역사
Victorian Britain & Nineteenth Century
Modern Britain
Prehistory
Roman Britain
Renaissance England
The Middle Ages
Changes in The Ways of Living
Bonus
Q
1798 아일랜드인 다시 한번 저항but실패
1801 연합법에 의한 브리튼의 아일랜드 지배
BONUS
브리튼의
아일랜드 식민지화 시작
제임스 왕 1세
반 가톨릭 세력아일랜드 진출
올리버크롬웰
무력개입
아일랜드 인구 1/3이 줄어듦
브리튼의 강압적인 지배 그리고 아일랜드인의 저항
아일랜드인의 손에서 벗어난 정부
1840 대 기근, 정부의 강압정책
기근과 더불어 이주로 인해 늘어난 인구수
19세기
그 이후
1916 부활절봉기
1921 남아일랜드 독립
1969 브리튼 군대의 아일랜드 상륙 ; 안정을 도모하기 위함
1972 피의 일요일 in Derry; 한 브리튼 군인이 군대철회시위하던 아일랜드인 사살 13명 사망 but 재판 없이 재직
1990 남 아일랜드의 경제적 부상, 그 여파로 북아일랜드의 저항감소
2005 아일랜드공화국급진파 무력개입종식동의
출처 : http://beclondon.blog.me/120107067167
배경 출처 : http://cafe.naver.com/worldrank.cafe
제임스 왕 1세 : 스코트랜드의 왕 그레이트브리튼왕
올리버 크롬웰 : 1641년 잉글랜드 정착민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아일랜드 인들이 자행했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자신이 총사령관 겸 총독으로 나서 반동의 거점인 아일랜드에 대한 무자비한 원정을 벌였다. 1649년 8월 더블린에 상륙한 그는 각지에서 싸워 아일랜드 제압에 성공했다. 이것은 왕당파에 대한 일대타격이었으며 동시에 아일랜드 토지의 3분의 2가 몰수되고 가톨릭이 전면 금지됨으로써 아일랜드 식민지화의 계기가 되었다.
A history of Britain
약 백만 년 전, 영국제도의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수렵·채집을 했고, 빙기 간빙기를 걸쳐 빈번히 왕래했다.
기원전 약8500년, 호모 사피엔스는 원형집을 짓고 부싯돌과 사슴의 뼈, 뿔로 만든 도구들을 사용했으며 목재부두를 건축했다. 이것은 그들이 정착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지만 빙기 때 그들은 브리튼에 남아있지 않았다.
선사시대 동물
세계 7대 불가사의 스톤헨지
보충자료
출처 : http://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query=%B8%BE%B8%F0%BD%BA&sm=top_hty&fbm=1
출처 : www.encyber.com
출처 : http://www.somangnote.com/DefaultF.aspx?photoID=719649&searchValue=
출처 : www. Yahoo.com
출처 : http://kin.naver.com
출처 : http://kr.blog.yahoo.com/yydeokk196/6227
INFORMATION
The Great Hunger(아일랜드 대기근)
1847년 어느 날부터 갑자기 감자마름병이 아일랜드 전역에 발생했다. 결국 그들의 주식이 없어지자 아일랜드인들은 하나 둘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대기근의 원인은 감자마름병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직접적인 원인은 영국인 지주들의 착취였다. 그들은 아일랜드인을 소작인으로 부리면서 많은 곡식을 축적했다. 당시 아일랜드에는 밀과 옥수수 등 각종 곡식이 많이 자랐으나 수확 하는대로 영국으로 가져가서 아일랜드인은 먹을 것이 없었다.
결국 그들에게는 주식이었기에 광범위하게 재배되었던 감자만이 조금 남아 있었으나 감자마름병이 발생했기에 많은 아일랜드인이 사망하게 된 것이다. 지주가 먹을 것조차 없는 아일랜드 소작인에게 소작료를 요구한 것도 아일랜드인이 대기근 기간 동안 굶주린 이유 중 하나이다.
800여 년간 영국의 식민통치에 시달린 아일랜드는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이 대기근은 19세기에 발생한 인류 최대의 재앙으로 기록되고 있다. 아일랜드인들은 지금도 영국인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http://cafe.naver.com/worldrank.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4452&topReferer=http://cafeblog.search.naver.com%26imgsrc=20090929_127/schnt7_12542310431922kjrp_jpg/famine_memorial_dublin_schnt7.jpg
INFORMATION
Easter Rising(부활절봉기)
시민들도 봉기에 등을 돌리고 봉기군의 공화국선언을 비웃었으며, 영국군을 환영하면서 체포된 의용군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 싸움에서 죽은 자는 시민을 합하여 500명을 넘었으며, 손실은 250만 파운드나 되었다. 항복 후 봉기 참가자는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100명 가까운 인원이 사형을 선고 받고 그 중 15명이 총살되었으며, 나머지는 무기형이 되었다.
이 지나칠 정도로 가혹한 처형은 아일랜드 민중을 격분시키고 자각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민중으로부터 증오의 대상이 되었던 봉기지도자는 일변하여 구국운동의 희생자이며 영웅으로 받들게 되었다.
영국정부는 봉기 관련자로서 3,000명 이상을 체포하여 투옥시켰으나 그들은 오히려 옥중에서 더욱 단련되고 석방된 후에는 독립투쟁의 핵심이 되어 활약하게 되었다.
봉기 자체는 실패로 끝났지만, 후에 성립된 아일랜드공화국 실현의 기점이 되었다. 봉기군은 아일랜드공화동맹(IRB)의 피어스, 크라크 등이 지휘하는 아일랜드의용군과 러킨, 코노리 등이 조직 ·지도한 노동자의 자위조직인 시민군으로 구성되었다. 봉기는 독일과 전쟁(제1차 세계대전)중인 영국의 허(虛)를 찌르기 위하여 IRB가 계획하고 자금 기타의 준비를 하였다.
봉기군은 부활절 월요일(24일)에 더블린의 중앙우체국을 점거하여 총사령부로 정하고 시내 각처의 주요 시설을 점령하였다. 사령부에서는 피어스가, 몰려든 시민들 앞에 나서서 아일랜드공화국 임시정부의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그러나 독일로부터의 무기 반입에 실패하고, 한편으로 봉기의 중지명령이 내려지는 등 혼란에 빠졌기 때문에 1만 명 예정이던 동원수가 2,000명도 채 못 되는 상황이어서 전투는 거의 더블린시(市)에 국한되었다. 이 때문에 영국군을 분산시키지 못하여 봉기군은 1주일도 지탱하지 못하고 항복하였다.
http://ko.wikipedia.org/wiki/%ED%8C%8C%EC%9D%BC:Easter_Proclamation_of_1916.png
Bloody Sunday(피의 일요일)
"의문의 여지가 없다, 피의 일요일에 영국군이 저지른 일은 용납할 수도, 정당화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영국 정부에 궁극적인 책임이 있으며, 깊이 사죄한다." 데이비드 캐머론 영국 총리의 사과연설이 생중계된 15일(현지시간), 북아일랜드의 제2의 도시 데리(Derry)의 길드홀 광장에 모여 TV를 지켜보던 1만명의 데리 시민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데리시는 1972년 피의 일요일사건이 발생한 현장이다.
영국 정부가 피의 일요일사건에 대한 전면 재조사를 실시한 지 12년 만에 과거 조사결과를 뒤집고 "전혀 무기를 갖지 않은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 영국군이 먼저 발포를 했다"고 최종보고서를 발표했다. 사건 직후 10주 만에 내놓았던 "일부 시위대가 폭탄, 총기를 소유하고 있었고 그들이 먼저 발포해 군인들이 응사한 것"이라는 조사결과를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38년 만에 마침내 정의가 세워졌다"고 보도했다.
영국 하원에 출석해 직접 보고서 내용을 설명한 캐머론 총리는 "조사 결과에 충격을 받았다"며 "보고서의 결론은 명확하다"고 말했다. 피의 일요일은 전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은 사건이었지만, 영국에서는 조사결과가 왜곡되면서 유족들은 오랜 기간 한을 풀지 못했었다. 그러다 1998년 토니 블레어 당시 총리가 유족과 가톨릭교도측의 의혹제기를 받아들이면서 재조사가 시작됐다. 법관 출신인 새빌 경을 위원장으로 조사위원회를 꾸려 피해자, 가해자, 목격자 등 900여 명의 증언을 들었고, 정부 및 군 자료 등을 조사했다. 이날 공개된 새빌 보고서는 총 10권으로 5,000쪽 분량에 달한다. 조사비용만 1억9,500만 파운드(3,500억원)가 들었다고 한다.
조사 결과, 시위대는 특별히 영국군을 도발하거나 위협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으며, 영국 병사들은 총격을 가하기 전 어떤 경고도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 계획된 발포는 아니었고, 과거 조사에서 영국 병사들이 위증을 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영군군은 당시 "무장세력이 접근하고 있다"고 오인하고 있었으며, 첫 사격을 가했던 N중위는 주변병사에게 미칠 효과를 인식하지 못했다. 현장 군 전체에 발포의 원칙이 무너져 있었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캐머론 총리의 발표가 있은 직후 당시 군 책임자였던 마이크 잭슨 경도 희생자들에게 사죄했다.
http://blog.ohmynews.com/gompd/147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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