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그 깃발의 시인 청마 유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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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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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그 깃발의 시인
청마(靑馬) 유 치 환
1. 생애 및 활동 (1908~1967)
1908년 7월 14일, 경상남도 통영시에서 한의인 아버지 유준수와 어머니 박우수 사이의 5남 3녀 중 차남으로 출생한다. 형은 극작가 동랑 유치진, 바로 아래의 아우는 시인 유치상이다. 5세 때 붓글씨를 배우고, 그 후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10세 때 통영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다. 1922년 통영초등학교 4학년을 수료하고, 형과 아우와 함께 일본 유학, 부잔 중학교 입학한다. 중학교 1,2학년 무렵부터 그가 탐독한 책은 주로 도쿠토미 로카의 『자연과 인생』 이었으며, 이 무렵 니체와 파스칼도 읽었다.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간토대지진 때, 무고한 동포 5천여 명이 학살된 ‘조선인 학살사건’이 발생하고, 그는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는다. 이 무렵, 동랑이 주재한 토성회(土聲會)의 멤버로서 동인지 『토성』에 시를 발표한다. 1925년 부친의 사업 실패로 유학을 계속하기 어려워 귀국하여 동래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해 1927년 졸업한다. 이 무렵, 통영의 동인지 『참새』 제2권 제1호(4집)에 「단가」라는 제목으로 토막시 9편을 발표한다. 192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본과에 입학했으나, 기독교적 분위기에 맞지 않아 1학년 때 중퇴하고, 다음해 21세 때 통영초등학교의 동창생 권재순과 혼인을 한다. 1930년에는 동랑과 함께 발간한 회람지 『소제부』에 시 26편을 발표하고, 31년에 대뷔작인 시 「정적」을 『문예월간』 제2호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단하였다. 첫 시집『청마시초』에 수록되어 있다.
1932년 아내의 권유로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평양으로 이주했으나, 신학교 입학을 거부하고 모회사의 평양지사 사원으로 근무한다. 1934년 부산시 초량동으로 이주하여, 부산사무소의 사원으로 일했으며 아내 권재순은 유치원 교사로 근무한다. 이 무렵부터 『동아일보』 등 신문ㆍ잡지에 작품을 많이 발표한다. 1937년에는 통영으로 돌아가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 해 7월 1일, 부산시 초량에서 동인지 『생리』 최상규, 장응두, 염주용, 박영포, 유치상, 최두춘, 김기섭을 회원으로 함. 5집까지 발행했다고 하나, 1집ㆍ2집의 소장자는 박문하, 3집~5집은 미상이다.
를 발행하는데 청마는 이 동인지에 「심야」(1집), 「창공」(1집), 「까치」(2집) 등을 발표한다.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를 발간, 여기에 시 「깃발」, 「일월」 등 55편, “이 시는 나의 출혈(出血)이요 발한(發汗)이옵이다.”라는 서문 등이 있다. 1940년 가족을 거느리고 북만주로 이주하여 형 동랑의 처가 소유의 농장 관리인으로 일한다. 이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사실상 ‘탈출’이라고 할 수 있다. 1945년 6월, 아내의 권유로 북만주에서 귀국. 아내 권재순은 문화유치원을 경영, 그 해 9월 15일 통영문화협회가 발족된다. 회장은 유치환, 간사는 윤이상, 회원은 전혁림, 정명윤, 김춘수 등이었으며, 한글강습회, 정서교육강습회, 시민상식강좌, 농촌계몽, 연극공연 등의 사업계획을 세워 실행한다. 그리고 10월, 통영여중 교사로 부임한다. 1946년에는 진주에서 발행한 동인지 『등불』 대표는 백상현, 설창수. 동인은 유치환, 이경순, 조향, 조지훈, 박목월 등이 있었다.
의 동인이 되었다. 4월 4일, 김동리의 사회로 자유민주주의와 민족문학을 옹호하기 위하여 결성된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좌익 계열의 문학단체가 문학을 당의 선전도구로 이용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민족진영의 젊은 문인들이 뜻을 모아 결성한 반공문학단체다. 1946년 4월 4일 결성하여 1947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약칭 문총)로 발전, 해체되기까지 공산주의 문학이론 타도에 기여하였다. 초대 회장은 김동리, 부회장은 유치환, 김달진
의 초대 부회장이 된다. 1947년 6월 20일, 제2시집 『생명의 서』를 발간한다. “나는 시인이 아닙니다.”라는 반시적(反詩的) 역설적 서문이 있는 이 시집에는, 대표작 「바위」, 「생명의 서」, 광막하고 황량한 북만주의 비정적 세계를 배경으로 생명의지와 허무사상을 읊은 시 58편을 수록하였다. 그 해 11월, 시인 서정주의 사회로 진행된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총회에서 제2대 회장 부회장은 서정주, 김달진.
이 되었으며,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주관 제1회 시인상을 수상한다. 1948년 9월 1일, 「울릉도」, 「눈초리를 찢고 보리라」 등의 시 34편을 수록하여, 제 3시집 『울릉도』를 발간하였으며, 1949년 제 4시집 『청령일기』를 발간한다. 1950년 6ㆍ25가 발발하여 통영시도 점령되자, 청마는 부산으로 피난한다. 9월 28일, 청마의 집에 병환중인 서정주가 요양오고, 또 조지훈이 찾아와 세 시인이 함께 며칠간을 보낸다. 조지훈의 시 「청마우거여담」은 세 시인이 청마의 집에 피난 와서 지냈던 일을 읊은 작품이다.
대구와 부산만이 남은 이 때, 청마와 조지훈은 청산가리를 품고 다니면서 적에게 밀릴 만인의 사태에는 자결할 각오를 했다. 9월 5일, 청마는 ‘경남문총구국대’를 결성하고, 원산 탈환전까지 종군한다. 그는 당시 최전방으로 종군한 유일한 시인이었다. 1951년 9월, 한국전쟁에 종군하여 최전방 체험을 담은 제5시집 『보병과 더불어』를 발간한다. 전쟁의 무의미 즉 반전(反戰)사상과, 적아의 차별을 초월한 휴머니즘의 자생을 보게 된다. 11월, 통영여고의 교사가 된다. 1952년에는 김춘수, 구상 등이 있는 대구의 동인지 『시와 시론』의 동인이 된다. 11월 경남 함양의 안의중학교의 교장이 되어 이곳에서 만난 아나키스트 박영환과는 평생 벗으로 지낸다. 1953년 4월 제 6시집이라고 할 수 있는 수상록 『예루살렘의 닭』을 발간, 1954년 4월에는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전임교수가 되어 문학론을 강의한다. 10월 안의중학교 교장을 사임. 제7시집 『청마시집』 이 시집은 『기도가』와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의 합본인데, 청마는 이를 두 권의 시집으로 간주한다.
을 발간한다. 다음 해 경주고 교장으로 취임. 경주 지역의 동인지 『청맥』의 대표로 추대된다. 1956년 『대구매일신문』에 발표한 「애국매국」에서 처음으로 ‘이승만 정권’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3선 출마와 부정비리를 비판하고, 1957년 발표한 논설 「대한민국과 도둑」에서 정치 및 관료권력의 부정부패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12월, 제9시집 『제9시집』을 발간한다. 1958년 10월 13일자 『대구매일신문』에 발표한 논설 「몰윤리의 근원이 되는 것」에서, 불순한 정치권력의 농단으로 민주주의 헌법이 파괴되고 있음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12월 『유치환시선』을 발간. 1959년 9월 자유당 정권 및 부정부패에 대한 계속된 비판으로 경주고등학교 교장직을 강제로 물러나게 되고, 『대구매일신문』의 논설위원이 되었으나, 사임. 12월 자작시 해설 『구름에 그린다』 출생기, 생장기, 만주 탈출, 6 25의 종군 등을 다룬「나의 시 나의 인생」, 기타 사상적 에세이를 묶은 저서.
를 발간한다. 1960년 3월 13일, 『동아일보』에 419혁명의 도화선의 하나가 된 것으로도 볼 수 있는 저항시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를 발표하여 더욱 심한 감시를 받게 된다. 3월 제 3대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나, 5월 419혁명을 계기로 자진 사퇴한다. 11월 6일에 발족된 경북청년문학회(회장 신동집)의 고문이 되고, 12월 5일 제10시집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를 발간한다. 마산의 315의거 희생자 김주열을 애도한 「안공에 포탄을 꽂은 꽃」, 419혁명의 한 불씨가 된 저항시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등이 수록되어있다. 419혁명 이후, 경주여자중고등학교 교장으로 복직. 1962년 대구여고. 1963년 경남여고 교장으로 전임한다. 그리고 12월, 「228학생의거기념탑비문」, 「419 민주혁명기념탑 비문」, 「경주에 와서」 등 72편의 산문이 수록된 수필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를 발간한다. 1964년 11월 제11시집 『미루나무와 남풍』을 발간. 1965년 516 후에도 계속된 정부와 권력의 비리를 비판하는 글이 화근이 되어,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 11월30일 『파도란 어쩌란 말이냐』를 발간. 『부산일보』에서 기획한 「새 한글 전용법안 시비」라는 청탁을 받고 「한글업자와 야합하는 우민정치」를 발표한다. 한자 병용을 통해 한자 문화어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 취지다. 1966년 제4대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 67년 부산문인협회회장으로 재추대, 부산예총 회장으로 추대 “이런 감투를 썼으니 성가시고, 또 어쩌자고 내가 시끄럽고 성가신 어중이들 패에 엎쓸려 들었는지 나 자신이 미워진다고 말했지만”(1967.1.26) 부산 문인들의 인화를 이룩하는 데 기여한다.
된다. 그리고 그 해 2월 13일. 9시 30분 무렵 문인들과 만나고 귀가하던 도중, 부산시 동구 수정동 봉생병원 앞 대로를 건너다가 차에 치여 부산대학교 부속병원으로 이송 도중 운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