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시기 조선의 변사들과 극장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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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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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일제 시기 조선의 변사들과 극장 풍경
목차
1. 연구의 범위와 목적
2. 변사와 관객 사이: 변사의 등장과 그 역할
3. 192030년대 극장 풍경: 유희공간에서 ‘종족공간’까지
4. ‘토-키-’의 등장과 서상호의 죽음: 그 많던 변사들은 어디로 갔나?
5. 소결
1. 연구 범위와 목적
변사는 감독, 배우, 기술자와 달리 한국 영화사에서 철저히 잊혀진 ‘주인공’이다. 구체적인 연행 기g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점 때문에 변사에 대한 제도, 인물, 생산물 등에 대한 연구는 극소수이고, 그나마 대학에서 이뤄진 소수의 연구들은 제한된 신문자료에 의존하고 있다. 현재 변사의 구체적인 언행 기록이나 1차 인터뷰 자료 가운데 접근이 가능한 것은 1930년대 중반 제작된 SP판 레코드 녹음을 기록한 김영무의 책 김영무 편, 『무성영화시절의 스타들과 유명변사 해설 모음집』, 창작마을, 2003.
이나 변사 성동호(1904-?)를 인터뷰한 이영일의 자료 한국예술연구소 편,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성동호, 이규환, 최금동 편』, 소도, 203.
등에 불과하다. 이런 기록의 부재와 더불어, 한국 영화사에서 변사는 유성영화의 등장과 함께 사라져간 과도기적 현상으로 간과되어왔고, 식민지 역사를 통해 유입되었다는 배경의 불순함까지 덧씌워져 한국 영화사의 ‘잊혀진 것’으로 간신히 기억될 뿐이었다. 변사에 대한 대중매체의 기록은 소위 마지막 변사라고 불리는 신출에 집중되어 있을 뿐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시대까지 변사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회고도, 추억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변사가 당시 일본이 가지고 있었던 영향력 때문에 같은 시기 아시아에 존재했던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각 국가의 경제적, 문화적 필요에 의해 각국의 전통문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받아들여지고, 또 발전했다는 입장에서, 한국의 변사는 일본 식민문화의 단순 모방이 아니라 한국적 연행 전통에 기반한 고유의 가치와 미학을 가지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옥미나, 「변사의 매개적 위상 및 의미에 관한 연구 : 한국 영화사에서의 역할을 중심으로」, 중앙대 석사논문, 2003.
이런 입장에서는 변사가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변사가 일본에서 가장 널리 발전했지만, 그 외에도 유성영화와의 경쟁을 위해 뒤늦게 변사가 도입되었던 태국의 예나, 높은 문맹률 때문에 유성영화 도입 이후에도 자막 대신 변사가 오랜 기간 존속했던 이란의 경우와 같이 각 나라의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의 변사 역시 단지 일본 식민지의 수입품이 아니라, 한국 영화산업 구조,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재구성됐다고 보는 편이 변사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유용하고 생각된다. 즉 조선의 활동사진관에 변사가 도입되고, 인기를 누리다가 소멸되는 과정은 식민지 시기 조선의 대중문화, 사회적 조건, 민중의 정서 그 자체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것으로, 당시 영화의 상영과 수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일제 시기 대중과 영화를 이어주었던 변사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은 한국 영화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 변사는 1935년 ‘토-키-’ ‘춘향전’의 등장으로 그 과도기적 역할을 마치고 완전히 소멸했는가? 이 글에서는 변사에 대한 기존 연구와 신문 데이터베이스, 변사 해설집 등을 통해서 이런 질문에 답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변사라는 특정 직업군에 대한 분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시 식민지 조선의 활동사진관의 분위기와 정서를 재구성하는 시도도 해 볼 것이다. 의 변사로 유명한 성동호나 의 해설로 인기를 끌었던 김영환을 통해, 그들이 활약했던 조선극장과 단성사 의 풍경, 그들이 울고 울렸던 관객들의 반응, 그리고 그 합으로서 식민지 조선의 극장 풍경에 한 걸음 다가가 보고자 한다.
이 글의 서술 범위는 1945년 광복 이전 변사의 활동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그 가운데 1920, 30년대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1930년대 중반 이후 유성영화의 등장에 따른 변사의 주변화, 1930년대 말 경제공황과 만주사변 등으로 인한 영화산업의 위축(외국영화 수입이 어려워짐), 조선인 전용 극장의 쇠퇴 1936년 조선극장이 화재로 폐관했으며 1939년 단성사는 명치좌의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에게 인수되어 명치좌 체인인 대륙극장으로 재개관했다.
등으로 조선인 변사의 활동 기록이 드물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변사의 활동은 지방으로 옮겨져 1950년대 중반까지도 계속되었다.
2. 변사와 관객 사이: 변사의 등장과 그 역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