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 이병기(嘉藍 李秉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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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가람 이병기(嘉藍 李秉岐)
1. 생애 및 활동사항
가람 이병기(李秉岐)는 1891년 3월 전북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에서 태어났다. 1898년부터 1908년까지 10년간 그는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1910년에야 관립 한성 사범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한성 사범학교에 다니면서 주시경 선생이 가르치고 있던 조선어 강습원을 수료했고, 이때부터 우리말과 글의 연구에 뜻을 굳혔다고 한다.
1913년 한성 사범학교를 졸업한 가람은 남양, 전주 등지의 공립 보통학교 훈도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국어 국문학, 국사학 관계의 문헌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시가 문학에 대한 연구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21년에는 권덕규, 임경재 등과 조선어 연구회를 조직하여 일제하의 조직적인 우리말 연구운동의 선봉이 되었다.
1922년에는 동광, 휘문고보 교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고 이때부터 시조 창작과 연구에 박차를 가한다. 1925년 『조선문단』 10월호에 첫 시조 「한강을 지나며」를 발표했다. 이 무렵은 시조부흥운동이 일기 시작한 때였고 가람은 사생(寫生) 실물이나 경치를 있는 그대로 그리는 일. 가람은 시조를 창작함에 있어서 먼저 사생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람의 사생론(寫生論)은 그의 지론이자 그의 작시태도이다.
의 서경적 시조로써 현대시조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1926년 동아일보에 시조론 「시조란 무엇인고」를 연재했으며, 같은 해에 시조문학의 구심점이 된 시조회((時調會)를 조직하였다. 1930년에는 한글 맞춤법 제정위원이 되고 1932년에는 가람의 대표적 논문인 「시조는 혁신하자」를 동아일보에 발표한다. 가람이 여러 문학장르 가운데서 시조의 양식을 취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의 시조는 자유롭게 선택된 자의적인 시형식이었다. 「시조란 무엇인고」,「시조는 혁신하자」 등 시조의 혁신론을 편 당대 최고의 이론가며 시인이었지만 가람은 어느 글에서도 시조라야만 된다든가 시조만이 전통양식이고 가장 민족적인 것이며 고상한 예술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1938년에는 연희 전문학교 강사가 되어 조선문학을 강의하게 되고 1939년부터는 동아일보 학예면의 시조난을 담당하며 같은해 『가람시조집』(1939)을 발간한다.
1942년에 조선어학회 사건 조선어학회사건이란, 1942년 8월 19일 조선어학회의 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어사전 편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실무를 맡고 있던 정태진이 함흥 영생여중학생사건의 증인으로 채택되어 함흥경찰서에 구류를 당하게 되면서 발단된 사건을 말한다. 홍원에서 다니던 영생여자중학교 한 학생이 전진역(前津驛)에서 형사들에게 불신검문을 당하게 되었다. 형사들은 노트 속에 끼워져 있는 ‘독립만세’의 글귀를 발견하고 그 학생을 연행하여 조사한 결과 이에 연루된 학생 5,6명이 검거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증인으로 불려간 이가 정태진이었으며, 그에게 조선독립 단체의 일원이라는 구실을 붙여 만들어 낸 사건이 소위 조선어학회사건인 것이다. 조선어학회의 간사직을 맡고 있던 가람은 홍원경찰서로 붙들려 가는 몸이 되었고 이로 인해 그동안 봉직해 오던 휘문고보를 사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흥형무소에서 1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기소유예로 풀려날 때까지 그는 이병기라는 이름 대신 453의 수인(囚人)번호를 달고 살아야만 했다.
으로 피검되었다가 1943년 기소 유예로 풀려나온 가람은 그때까지 모은 귀중한 책들을 가지고 낙향하여 농업에 종사하는 틈틈이 우리의 고전문학을 섭렵한다. 광복 직후 다시 상경, 1946년 군정청 편찬과장과 서울대학 문리대 교수를 역임했다. 1948년 『의유당일기(意幽堂日記)』, 『근조내간집(近朝內簡集)』등을 의역 간행했으며, 『국문학전사』(1952)를 백철과 공저로 발간, 문학으로 본 한국문학사를 총정리 분석하였다. 1957년 10월 9일 한글날에는, 한글날 행사와 함께 『우리말 큰사전』 출판기념회가 열렸는데 이 행사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갑자기 뇌출혈이 일어났다. 요양 중, 건강이 회복되어 1966년에는 초기 작품을 포함하여 시조 93편과 시조론, 고전연구, 일기 등을 수록한 『가람문선』을 발간했다. 10년 동안 병마와 싸우다가 1968년 향년 78세로 숨을 거두었다.
2. 시조론 ‘시조는 혁신하자.’
가람의 시조 창작 활동은 192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이 시기는 국민문학파를 중심으로 프로문학에 대응한 민족주의 문학운동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시조부흥운동을 처음으로 제시한 것은 최남선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이 운동을 이어나간 인물은 이병기와 이은상으로 대표된다. 이들은 시조를 과거와 같이 악과의 창사로서 시조가 아니라 우리의 언어적 특성과 민족적 리듬이 응결된 단시 형식으로 보고 그 중요성과 부활의 당위성을 강조한 것이다. 단지 시조를 부흥하자는 말 뿐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원칙에 입각한 이론(시조론)을 주장했었고 그 구체적 실천방안까지도 제시되었다.
시조 부흥을 위해 가장 눈에 띄는 실천적 요소가 가람의 연시조 창작과 구별배행의 창작 기법이 있다. 이렇듯 가람은 시조 부흥을 위해 단순히 시조 창작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시조의 이론을 체계화하여 시조 창작을 펼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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