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문화사연구회 신라 촌락문서를 통해서 본 신라촌락사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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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고대문화사연구회 신라 촌락문서를 통해서 본 신라촌락사회의 모습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국고대문화사 연구회
신라 촌락문서를 통해서 본 신라촌락사회의 모습
들어가며
우리 조상들의 삶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이러한 궁금증은 역사를 공부하면서 항상 생기는 궁금증이다. 이번 기회에 일본 정창원 소장의 신라촌락문서를 고찰하면서 이 시기의 신라의 촌락사회의 모습은 어떠하였는지를 살펴 보도록 하자. 먼저 촌락문서는 언제 만들어졌으며,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 그리고 촌락문서에 나오는 주요 개념들에 대해 살펴보고, 이를 통해 촌락사회의 모습을 유추해 보도록 하자.
※촌락문서에 보이는 4개의 촌을 사해점촌→A촌, 살하지촌→B촌, 실명촌→C촌, 서원경관내촌→D촌으로 표기한다.
1.작성연대
본 문서의 작성연대는 AB촌에 보이는 을미년 기준으로 755년 설과 815년 설이 가장 유력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 문서 내 촌락들은 관료전정전제가 실시될 수 있었던 중대 신라정부의 체제정비의 선상에서 나오는 후기녹읍의 지배방식과 궤를 같이 하는 지배를 받고 있다. 즉 이 문서의 작성연대는 을미년 기준으로 815년이 될 것이다. 旗田巍씨는 내시령답이라는 관료전을 주목하여, 관료전은 757년 (경덕왕16년) 3월의 녹읍부활시에 없어졌다고 추정하고, 따라서 이 문서는 그 이전 을미년 즉 755년에 작성되었다고 보았다.그런데 문무관료전은 녹읍→세조→월봉과 병렬적으로 실시되고 있었고, 관료전은 녹읍의 변동과는 무관하게 녹읍 부활이후에도 계속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바 있다. 이같이 볼 때 755년 설은 논거가 없다.
2. 촌락문서에 나타난 촌락지배 방식
4개의 촌락에는 군현적 지배와 내성의 지배가 같이 이루어지고 있다. 정전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 연수유전답의 소유량 등 재산이 고려되어 공연이 편성되고, 재산의 크기에 따라 호등이 매겨지며, 중상연을 1로 한 계연치가 해당호수에 곱해져 합한 값이 촌락의 경제력의 환산 치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군현체제의 전국적 운용 즉 행정관료 체계에 의한 양전과 명확한 연별 재산파악에 의하여 가능했던 것이다. 촌주위답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촌주의 역할이 수납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내성 즉 내시령과 업무상 연결될 것임을 쉽게 알수있다. 따라서 그는 군현행정체계상의 행정촌주로서 그 직위에 따른 위답을 촌락 내에 확보하게 된 것이다. 군현체계의 권력이 보장받고 있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그런데 이곳에 내성 사령인 내시령이 조와 조 그리고 그것들을 운반하고 생산관리하는데 필요한 역을 징발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마을들의 연의 이동은 내성 측의 승낙 없이는 용납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4개의 촌락은 군현지배와 내성의 지배를 동시에 받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촌락지배 방식을 녹읍과 연관시켜 보면 후기녹읍의 지급을 ‘녹읍부활’이라고 말하지만, 관료들의 녹읍을 폐한 다음 세조를 주었고, 이에 앞서 측량된 토지만을 결부 수량에 맞춰 주었을 문무관료전을 지급하였으며, 백성일반을 상대로 전국적 量田을 전제로 한 정전제를 실시했던 경험 뒤에 나온 것인 만큼, 후기녹읍 녹읍의 변화:전기녹읍→세조→월봉→후기녹읍
과 전기녹읍은 현저한 성격차이가 있다. 정부의 입장으로는 전국적인 量田과 재산의 파악 그리고 그에 따른 계연파악에 힘입어, 종래의 월봉 지급에 따른 행정상의 어려움 국가로서는 조의 수납뿐 아니라, 운송과 보관, 배분도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또한 천재지변시 수취가 어렵더라도 월봉을 지급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는 경제력에 대한 정확한 파악을 통해 수취원을 정확히 분배해 줌으로써 그러한 부담을 크게 줄이게 되었을 것이다.
을 줄이는 행정의 효율적 운용이라는 점에서 녹읍은 부활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