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역사와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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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유산

노래 속에는 추억이 있다.
서로 다른 많은 이야기들이 모여 시대가 되는 것처럼 노래는 그 시대 사람들의 공동의 체험과 감성이 담겨있다. 때문에 노래로 시대를 읽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가능하다. 시대적 배경을 서술하고 그 속에서 사람들의 욕구와 감성의 변화를 살피고 그것이 문화로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예술가곡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유행가라고도 한다. 예술가곡이 예술성과 심미성에 가치를 두는 데 반하여 대중가요는 감각적인 대중성 ·오락성 ·통속성 ·상업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예술가곡을 제외한 가요 전반을 의미하나, 민요와는 구분된다.

한국에서는 1885년 미국의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종교사업과 교육사업(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을 시작하면서 찬송가의 보급과 더불어 ‘창가(唱歌)’라는 신식 노래가 등장하였다. 창가의 어원은 운문형태의 문학에서 비롯되었다. 일반적으로 ‘노래부르기’를 말하는데, 초창기는 시형(詩型)이 다분히 일본의 것을 모방한 듯한 5 ·7 또는 7 ·5조 등의 음절을 기본으로 하는 신시조의 유행시대였다.
이 당시 한국에서는 예술적인 가곡도 ‘가요’라는 개념에 포함되어 있었다. 일반대중에게 ‘유행소가(流行小歌)’라는 말이 익숙해진 것은 14년 이후이다. 37년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킨 뒤 전시체제에 맞지 않는다 하여 종래의 퇴폐적인 유행가를 제한 ·금지시켰다.
그러나 일제가 군가 ·애국가요 ·국민가요라는 명칭을 붙여 획일정책으로 몰고 갔을 때, 유행가는 보다 더 대중적인 노래라고 해서 ‘대중가요’라는 새로운 명사를 쓰기 시작하였다. 순수음악에서는 유행가와 구별하기 위해 ‘예술가’ 또는 ‘예술가요’라고 구분하기 시작하였고, 최근에는 ‘가곡’으로 통칭된다.

초기에는 가요를 전문으로 부르는 ‘가수’가 없었기 때문에 전문적 가수가 아닌 당대의 명창, 명기들이 판소리와 민요 등을 일본에 가서 취입하는 등 가요계 참여가 두드러졌지만, 1930년대 이후 가요를 노래하는 본격적인 가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요음반이 대중의 기호물이 되면서 연극배우들 중에서 ‘막간무대’에 등장했던 인기배우들이 대거 가요곡을 취입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본격적인 가수가 등장하여 활약했던 1935~1936년까지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초창기의 창작가요는 대부분 신민요풍의 가요가 특징으로 나타났는데, 축음기의 판매를 중심으로 레코드의 범주도 다양해졌다. 곧 판소리 ·민요 ·가곡 ·동요 ·극영화해설집 ·드라마 ·만담 ·경음악(주로 미국의 재즈 ·팝송 ·찬송가)과 서양 고전음악 등 다양해졌다. 그러나 역시 대중가요가 레코드의 대종을 이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