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가의 범주와 갈래적 특징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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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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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잡가의 범주와 갈래적 특징 연구

Ⅰ. 서론
Ⅱ. 잡가의 생성과 의미의 변천
Ⅲ. 잡가의 범주
Ⅳ. 잡가의 갈래적 특징
Ⅴ. 잡가의 문학사적 의의
Ⅵ. 결론
Ⅰ. 서론
잡가는 갈래의 특성상 개념이나 형성 시기 및 과정·범주 등 여러 방면에서 논란이 많다. 1934년 잡가에 대한 이병기의 언급이 있은 이후, 국문학사 및 개설서에서 의례적으로 잡가의 개진이 이루어졌다가, 1982년 정재호를 필두로 잡가에 대해보다 본격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가 시작된다.
잡가는 논란이 많은 만큼 범주나 형성 시기 및 과정 등이 확정된 것이 없다. 본고에서는 잡가의 생성과 그 범주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견해를 살펴보고, 잡가가 갈래로서 가지는 독자성을 바탕으로 그 갈래적 특징을 분석하고자 한다. 그리고 잡가가 가지는 의의를 고찰한 뒤, 여러 가지 견해들을 바탕으로 잡가에 대한 생각을 서술하겠다.
Ⅱ. 잡가의 생성과 의미의 변천
잡가의 발생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며, 발생 시기로 추정되는 시기는 17-19세기로 그 폭이 넓다. 고정옥은 『조선민요연구』에서 상층인의 창작 가사가 연산군의 好樂愛好 등으로 인해 유흥의 거리까지 가고, 기생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초동들까지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잡가를 연산군 이후 상층의 작품이 하강한 문학의 현상으로 파악한다. 김동욱은 잡가가 병자호란 이후 가사가 분화되면서 생겼다고 했다. 김승찬은 잡가의 발생이 18세기에 일어났다고 하며, 그 실마리가 12가사의 존재에 있다고 했다. 십이가사가 정악으로 불리다가 속악으로 편입·잡가로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잡가가 19세기에 생겼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19세기는 화폐 경제와 도시의 발달, 신분제에 대한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이에 따라 민중의 저항 의식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김사엽은 잡가가 19세기 광대에 의해 생긴 것으로 본다. 19세기 초 서민층의 문화 활동이 커지면서, 민요층이 가사에 접근하기 위해 가사를 모방하고, 그 속에서 가사가 점점 속되게 변하여 잡가가 생겼다는 것이다. 최동안, 『잡가 연구』,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2003, 28-36쪽
잡가의 발생 시기에 대한 논의가 이렇게 다양하지만, 잡가에 관한 문헌의 기록과 잡가의 생성이 민중 문화가 성장한 사회상과 관련이 있는 점을 추론해보면 잡가는 18세기에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서민들의 가창가사가 수록된 『청구영언』의 출판 시기가 1728년이고, 『남훈태평가』 등 18세기의 문헌에서 잡가라는 단어가 나타난 점이 그 근거가 된다. 또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도시와 화폐가 발달하고, 여항 문화가 성행하며, 신분제에 대한 의식 변화 등으로 인해 민중들만의 문화가 형성된다. 잡가가 민중들이 향유하던 갈래임을 생각할 때, 민중 문화의 형성은 잡가의 발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편, 잡가가 생성되고 전개되는 과정 속에서, 잡가의 명칭과 개념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다. 18세기의 잡가의 개념은 현전하는 문헌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사대부층의 저술에 나타난 雜著·雜詠·雜記 등의 용어를 봤을 때 사대부들의 문헌에 나타난 잡저·잡영 등과 같은 잡문은 형식을 특정할 수 없으면서 내용은 雅正하지 않은 글,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글이다.
, 잡가의 초창기 개념은 저속하다는 의미보다 대엽조·가곡창과 같은 본류적 정통성을 갖지 않은, 갈래적 승인을 얻지 못한 ‘나머지’ 갈래에 대한 통칭의 의미였다. 이렇게 잡가의 개념 형성은 다른 갈래와의 관계 속에서 시작되었고, 이 때문에 잡가는 그 개념이나 범주가 시대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박애경, 「잡가의 개념과 범주의 문제」, 『한국시가연구』 제13집, 한국시가학회, 2003, 292쪽
윤달선의 『광한루악부(호남악부)』는 판소리 열두 마당을 잡가 12腔이라 했다. 1863년 활자판 가집인 『남훈태평가』는 수록 작품을 시조·잡가·歌辭로 나누었고, 「백구사」·「매화타령」을 「소춘향가」를 잡가에, 「춘면곡」·「상사별곡」·「처사가」·「어부사」를 수록했다. 이로 미루어 가사의 형식, 내용을 고려하지 않고 잡가의 창조로 부르면 잡가가 되는 음악상의 명칭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정현석이 편찬한 『교방가요』는 시조·가곡·정재무·잡가를 각각 독립 항목으로 설정했는데, 여기에는 「춘면곡」·「처사가」·「관동별곡」을 같이 싣고 있다. 송만재의 「관우희」·안민영의 『금옥총부』는 잡가와 판소리의 혼용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는 잡가를 도시의 가창문화권 내에 편입된 민속악 전반이나, 민속악과의 교섭 흔적이 뚜렷한 가창물로 인식했다. 가창문화권에 유입된 노래들은 도시의 유흥 공간에서 공존·경쟁·상호 모방의 과정을 진행했다. 그 속에서 잡가는 민속악·정악의 요소를 흡수하여 새로운 곡조로 다듬어지고 파생된다. 판소리는 「춘향전」을 한시화한 유진한의 「歌詞春香歌 二百句」가 나온 이후 打令·打鈴 등으로 불린다. 그러면서 가창가사 중 「매화사」·「황계사」를 「매화타령」·「황계타령」이라 부르기도 했다. 19세기 중엽에 판소리·잡가 등 민속악을 저변으로 한 긴 노래를 두루 타령 혹은 잡가로 불렀음을 보여준다. [박애경, 위 논문, 294-2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