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북장로회 서울 선교지부와 평양 선교지부의 관계

 1  미국 북장로회 서울 선교지부와 평양 선교지부의 관계-1
 2  미국 북장로회 서울 선교지부와 평양 선교지부의 관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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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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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미국 북장로회 서울 선교지부와 평양 선교지부의 관계
1. 머리말
선교지부(Station)는 구조적으로 해외선교본부(Board), 현지선교부(Mission)와의 종적인 관계를 지니는 동시에 타 지역 선교지부와의 횡적인 관계를 지닌다. 초기 한국 선교를 전개한 미국 북장로회, 미국 북감리회, 호주 장로회, 미국 남장로회, 미국 남감리회, 캐나다 장로회의 6개 교단이 설립한 선교지부가 모두 이러한 종적횡적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 연구에서는 선교지부의 횡적인 관계에 집중하여 미국 북장로회의 서울 선교지부와 평양 선교지부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선교지부에 관한 연구는 지역 교회사 연구의 일환으로 비교적 최근에 시작되었다. 송현숙, “호남지방 기독교 선교기지 형성과 확장에 관한 연구,”「한국기독교와 역사」제19호(2003, 9): 225~260, 송현강, “남장로교 목포지부(Station)의 설치와 운영,”『교회와 역사: 청암 박정규목사 고희기념논문집』(서울: 서울교회사연구소, 2009): 459~477.
미국 북장로회 서울 선교지부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설립된 선교지부였다. 이후 서울 선교지부는 미국 북감리회의 서울 선교지부와 협력관계를 형성하며 한국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특히 타 지역으로 선교지부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을 주도하였으며, 타 교단의 내한이 병행되는 복잡한 상황에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비교적 안정된 선교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일조하였다. 서울 선교지부가 비교적 순조롭게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미국 공사관을 통한 한국 정부와의 우호적 관계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초기 선교지부들 사이에서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서울 선교지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평양 선교지부의 급성장을 바탕으로 서울 선교지부를 중심으로 하던 기존의 판도가 바뀌게 되었다. 이처럼 초기 서울 선교지부를 중심으로 형성된 선교지부 사이에서의 관계구도가 평양 선교지부의 두각으로 새롭게 변화되는 과정을 통해 한국에서 선교지부가 지닌 횡적인 관계의 일면을 검토하는 것이 이 연구의 한 목적이다. 이는 각 선교지부가 나름대로 지니고 있는 지역적 특성이나 신학적 차이가 해외선교본부나 한국의 현지선교부와의 종적인 관계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에서 다른 선교지부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횡적인 관계의 특성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입증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2. 서울 선교지부와 타 지역 선교지부의 관계
1) 서울 선교지부의 타 지역 선교지부 개설
서울 선교지부는 미국 공사관 옆에 설립되었다. 알렌(H. N. Allen, 1858~1932)이 미국 공사관 의사로 한국 생활을 시작한 것과 국제 조약을 통해 외국인 거류지가 정동에 마련된 것이 큰 이유였다. 한국은 당시 일본, 미국, 중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와의 조약을 체결하였고, 그 결과 부산과 인천, 그리고 서울에 외교관은 물론 일반 상인들까지 거주할 수 있게 되었다. ‘한일수호조규’(1876. 2. 26)나 ‘한미수호통상조약’(1882. 5. 22)에는 일반 외국인의 서울 거주 항목이 설정되지 않았다. 서울에 처음으로 외교대표가 아닌 일반 외국인의 거주를 인정한 것은 ‘한청상민수륙무역장정’(1882. 8. 23)을 통해서였다. 이후 체결되는 ‘한영수호통상조약’(1883. 11. 26)과 ‘한독수호통상조약’(1883. 11. 26)에서 바로 이 조항이 적용되었으며, 이전에 체결된 조약에 대해서도 소급 적용되었다. 따라서 서울은 개방시가 되었으며 이를 소위 ‘한성개잔’이라 한다. 정해식 편,『구한말조약휘찬 상: 입법참고자료 제18호』(서울: 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 1964), 10;『구한말조약휘찬 중: 입법참고자료 제26호』(서울: 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 1965), 289;『구한말조약휘찬 하: 입법참고자료 제27호』(서울: 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 1965), 395; ‘한성개잔’에 대해서는 손정목,『한국개항기 도시변화과정연구』(서울: 일지사, 1982), 178~182.
알렌은 인천이나 부산 등을 살핀 후 서울을 선교지부 설립의 최적의 장소로 결정하였다. 처음부터 알렌은 선교지부를 설립할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Fred Harvey Haington, God, Mammon, and the Japanese: Dr. Horace N. Allen and Korean-American Relations, 1884-1905(Madison: The Un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6), 10.
서울 선교지부는 우선 의료와 교육 선교를 병행하는 병원과 부속학교를 설립하였고, 그 다음으로 고아들을 모아 학당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교회를 설립함으로써 병원, 학교, 교회를 축으로 하는 소위 ‘트라이앵글 메소드’의 기초를 완성하였다. 서정민,『제중원과 초기 한국 기독교』(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3), 130.
서울 선교지부 형성 과정은 해외선교본부의 인적물적 지원은 물론 한국 정부에 대한 미국 공사관의 적극적인 교섭, 한국 정부의 승인, 한국 백성들의 관심과 참여를 바탕으로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서울 선교지부의 외형적 구조가 형성되면서 선교사들은 신속히 한국 전체를 기독교의 영향권 아래 두고자 했다. 이를 위해 서울 선교지부 선교사들은 한반도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지 답사 여행을 시작하였다.
이 여행에는 미국 공사관을 통한 호조의 신청과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승인이 있어야 했다. 그 당시 미국 공사관은 물론 한국 정부에서도 선교사들이 한국 내지를 여행하려는 의도와 목적을 잘 알고 있었지만 묵인하였다. 류대영,『개화기 조선과 미국 선교사: 제국주의 침략, 개화자강, 그리고 미국 선교사』(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4), 243, 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