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인물분석

 1  안창호 인물분석-1
 2  안창호 인물분석-2
 3  안창호 인물분석-3
 4  안창호 인물분석-4
 5  안창호 인물분석-5
 6  안창호 인물분석-6
 7  안창호 인물분석-7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안창호 인물분석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안창호(安昌浩, 1878 ∼ 1938)

1. 도산 안창호의 생애
도산 안창호는 평안남도강서(江西)에서 안흥국(安興國)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선대는 대대로 평양 동촌(東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때에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으로 옮겨왔다. 8세까지 가정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9세에서 14세까지는 강서군 심정리에 머물며 김현진(金鉉鎭)에게 한학을 배웠다. 이때 서당 선배인 필대은(畢大殷)과 알게 되어 그로부터 민족주의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받았다. 1895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교육을 통해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장로교선교사인 호러스 언더우드가 경영하는 구세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3년간 수학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서구문물과 접하게 되었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평양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한 만민공동회를 쾌재정에서 개최하여 약관의 몸으로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안겨준 연설을 하였다. 훗날 종교가이며 교육자로서 민족의 지도자가 된 이승훈은 이 연설에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의 의지를 굳혔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1899년 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로 남녀공학의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는 한편 황무지 개척사업을 벌였고, 앞으로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을 더욱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고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을 하면서 초등과정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 이듬해에는 교포들의 권익보호와 생활향상을 위해 한인공동협회를 만들어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간하였다.
그 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6년 귀국, 1907년 이갑· 양기탁· 신채호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구에 태극서관을 세워 출판사업을 벌이고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 육성에 힘쓰는 한편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의 지도자 양성에 힘쓰는 등 다방면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05인사건’으로 신민회·청년학우회가 해체되자 1913년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였다. 3·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내무총장·국무총리대리·노동총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였다. 1921년 임시정부가 내부분열을 일으키자 이를 수습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4년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 조직을 강화하였다
1926년 다시 상하이로 가서 흩어진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진력하였으며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상촌(理想村) 건설에 뜻을 두고 이를 추진하였으나 일제가 중국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실패하고,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2년 6개월을 복역한 뒤 가출옥하여 휴양 중 동우회(同友會)사건으로 재투옥되고, 1938년 병으로 보석되어 휴양 중 사망하였다.
2. 도산 안창호의 교육사상
(1) 사상과 철학
도산은 우리 민족이 독립을 이룩하려면 민족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제 힘만큼 밖에 달릴 수 없듯이 민족도 제 능력만큼 밖에 발전할 수 없다. 큰일에는 큰 힘이 필요하고 작은 일에는 작은 힘이 필요하다. 작은 힘으로 큰일을 할 수 없다. 힘이 있으면 살고 힘이 없으면 죽는다. 이것이 자연과 역사의 준엄한 법칙이며 힘이 일체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을 믿고 힘을 기르는 도리밖에 없다. 도산은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이 독립에 필요한, 독립을 달성할 만한 힘을 길러야 한다는 힘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힘의 필요와 힘의 양성을 주장한 다음, 무슨 힘, 어떤 힘을 기를 것이냐를 논하였다. 그는 단결의 힘, 도덕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고 또한 지식의 힘, 금전의 힘, 인격의 힘을 기르자고 주장했다. 또 표현을 바꾸어 신용의 자본, 지식의 자본, 금전의 자본을 저축하자고 말하며 특히 동맹저축을 강조했다. 서로 동맹하여 그러한 힘과 자본을 저축하자는 것이었다. 한 개인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에도 건강이니 지식이니 기술이니 하는 밑천, 즉 자본이 필요하다. 한 민족이 독립 국가를 이룩하려면 여러 가지의 힘과 밑천과 자본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특히 인격의 힘은 도산이 평생 독립운동의 중심에 두고 추구하였던 힘이다. 도산은 개인 하나하나의 건전한 인격은 집을 짓는데 쓰이는 재목과 벽돌 하나하나가 튼튼하고 견고한 것과 마찬가지라며 개인의 인격과 민족의 힘과의 관계를 집짓기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나 하나가 건전한 인격이 되는 것이 곧 애국의 길이라며 나부터 나를 건전 인격으로 만드는 일이 민족을 강하게 하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수양, 즉 독립 이라는 도산의 사상이 여기서 유래한다. 도산은 건전한 인격은 다음 세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첫째로 사(思)·언(言)·행(行)에 있어서 남의 본보기가 될 만한 건실한 도덕적 품성을 가져야 한다. 건전한 인격은 먼저 덕성을 지녀야 한다. 인격적 덕성을 함양하기 위해서 도산은 무실(務實), 역행(力行), 충의(忠義), 용감(勇敢)의 4대 정신을 강조했다.
둘째로 건전한 인격은 한 가지 이상의 전문 지식과 생산 기능을 가진 생산적 직업인이라야 한다. 도산은 특히 이것을 강조했다.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기술자를 장(匠)이라고 하여 생산 기능을 멸시하는 폐습이 있었다. 그래서 놀고먹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런 불로(不勞)의 악습에서 민족의 번영과 부강을 바랄 수는 없다. 도산은 일하는 것은 즉 민족의 번영을 위하는 애국행위라 하여 이를 늘 장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