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우면서도 먼 나라 일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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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 일본의 역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장원의 발달에 설명하기에 앞서, 장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사유지를 경영하기 위해 현지에 사무실과 창고를 설치하여 莊(장)이라 불렀는데, 이윽고 사유지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 되고 장원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장원이 형성된 배경
상부층의 정치적 동요와 재정의 파탄은 농민의 부담으로 전가되어 농민의 도망을 촉진시켰습니다. 이로인해 인구 증가에 따른 구분전(口分田)의 부족과 도망으로 인한 구분전의 황폐화를 개선하기 위해 개간한 토지를 농민이 사유케 하는 삼세일신법(三世一身法)과 간전영세사유법(墾田永世私有法)을 시행하여 개간을 장려하였으나 이 법은 재력 있는 귀족이나 광대한 산야를 소유한 사원이 노비와 유랑민을 시켜 개간케 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장원(莊園)을 형성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습니다.
*장원의 발달
율령제도의 붕괴와 함께 헤이안 중기로 접어들면서 중앙의 세금징수를 대리하는 고쿠시(司, 국사)의 세력이 강해지자 다시 부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에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던 지방 세력 다이묘(大名, 대명)들이 고쿠시와 결탁함으로 인하여 장원은 급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8세기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초기 간전지계(墾田地系) 장원은 주변의 간전 농민이나 부랑인(浮浪人)을 이용한 것으로, 대부분 국가에 조세를 바쳐야 하는 땅이었으므로 경영이 불안정한 가운데 9세기에는 쇠퇴하였습니다. 그러나 점차 조정으로부터 태정관부(太政官符)나 민부성부(民部省符)를 받아 내어 조세를 면제받은 장원(관성부장, 官省符莊), 그리고 10세기 중반 이후에는 국사에게 조세 면제를 인정받은 장원(국면장, 國免莊)도 생겨났습니다.
유력한 재지호족 중에는 주변의 산과 황무지를 개간하여 대토지소유자가 된 사람도 많았는데 이들을 개발영주(開發領主)라 합니다. 이들은 고쿠시에게 압력을 받게되면 중앙권력자와 결탁하여 새로운 영주로 받아들이기도 하면서 장원을 유지하게 되는데, 이러한 영주를 영가(領家)라 하고, 이 영가가 다시 대귀족에 바치게 되면, 그 대귀족은 本家(본가)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것을 寄進地系莊園(기신지계장원)이라 한다.
기신지계장원은 11세기 중반 이후 각지에 확대되었습니다. 특히 기나이 주변에는 유력 사사(寺社)가 헌납을 받고, 조정이나 국으로부터의 잡역을 면제받은 장원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이 같은 불수(不輸, 조세 면제), 불입[不入, 검전사(檢田使) 등의 국사 파견과 출입 금지]의 특권 제도가 확대되어 감에 따라 점차 국가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토지와 인민의 사적 지배가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불수조(不輸租)의 장원이 증가하면서 국가가 거둬들이는 조세가 감소하게 되자, 이에 장원정리령을 내렸는데 902년 이후에도 984, 1040, 1045, 1055, 1069년에 거듭 발표하였으나 최대의 장원 영주인 후지와라씨가 정치의 고위(高位)에 있었으므로 성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지방정치의 문란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에 걸쳐 기나이(畿內) 주변국에서는 군사 및 농민이 교토에 올라가 직접 조정에 국사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또한 국사가 징세 청부인으로서 지방 정치에 큰 역할을 하게 되면서, 귀족들 사이에서는 그 지위를 서로 희망하게 되어 개인의 재물을 바쳐서 정부의 공적인 행사 비용을 대고, 그 공에 의해 관직을 얻거나 또는 국사의 임기를 연장받는 것이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국사로 임명되어도 지방에 부임하지 않고 대관(代官)인 모쿠다이(目代)를 파견해서 정치하는 요닌고쿠시(遙任國司 요임국사)도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10세기경부터 고쿠(國) 행정의 전 권한은 현지에 부임한 즈료(受領)에게 맡겨지게 되고, 조정은 그 임기 중 조정에 대한 공납의 책임을 묻는 것 외에는 적극적으로 그 행정에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군사에 임명되었던 전통적인 지방 호족의 몰락에 따라, 이제까지 군사가 행해 온 각종의 행정 기능은 고쿠시 밑에 집중되었습니다. 또한 재지의 유력자가 재청관인(在廳官人)으로 그 사무를 담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쿠시는 재지의 유력자를 무력으로 조직하여 국아군(國衙軍)을 형성하여, 물자·노역의 징발과 치안 유지에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다. 이리하여 11~12세기에 걸쳐 국아는 그 국내를 지배할 수 있는 하나의 독자적인 권력 기구로까지 성장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