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멜빌 문예 작가 작품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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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허먼 멜빌 문예 작가 작품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891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멜빌의 친 외조부는 모두 독립전쟁의 영웅이었고 양가 모두 명문가문으로 멜빌은 유년시절을 비교적 풍족하게 지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엘런 멜빌의 사업실패와 잇따른 죽음으로 멜빌 가족은 경제적 위기에 빠지게 된다. 멜빌은 은행점원으로 일하기도 하고 시골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지만 1837년 경제공황 이후에는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1839년에 상선 세인트 로렌스호를 타고 영국의 리버풀로 항해하며 선원으로 최초의 경험을 쌓는다. 그 후 그는 서부에서 직업을 찾는데 실패하고 1841년 남태평양행 포경선인 애쉬쿠넷 호에 몸을 싣는다. 그러나 그는 이 배가 마퀴사스 군도의 누쿠히바섬에 정착 했을때 토비 그린이라는 선원과 함께 탈주하여 타이피라는 부족과 함께 한 달을 지낸다. 그 후 그는 호주의 포경선인 루씨앤호를 타고 타히티에 도착하는데 그곳에서 복무거부 때문에 투옥되고 루씨앤호가 떠난 후 탈옥하여 근처 에이미오 섬의 해안가에서 약 2주간 부랑자 생활을 한다. 이후 그는 다시 낸터킷의 포경선인 찰즈 앤드 헨리 호에 승선해서 라하이나 섬으로 가고 호눌룰루에서 몇 달 간 체류한 후 미국 군함인 유나이티드 스테이츠호를 타고 약 1년간의 항해 끝에 1844년 10월 보스턴으로 귀환한다.
귀향한 멜빌은 누쿠히바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최초의 소설 [타이피](Typee, 1846)를 출판한다. 사실성 여부에 관한 논란이 있긴 했지만 [타이피]는 대중적 성공을 거둔다. 멜빌은 타히티와 에이미오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두 번째 소설인 [오무](Omoo, 1847)를 쓰고 이 역시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는다. 작가로서의 멜빌의 첫 위기는 세 번째 소설인 [마디](Mardi, 1849)에서 비롯된다. [마디]는 이전의 두 작품과 같이 모험소설로 시작하지만 멜빌은 자신이 읽은 많은 철학서적과 1848년에 발생한 유럽혁명의 영향을 받아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내용과 유럽과 미국의 정치에 대한 비판적 풍자를 첨가하여 작품의 성격을 크게 바꾼다. 모험소설을 기대하던 독자와 평자들이 실망한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대중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마디]는 멜빌이 기존의 모험소설의 틀을 벗어나 특유의 문학세계를 탐구한 중요한 시도로 볼 수 있다. [마디]의 실패 후에 멜빌은 재정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두 권의 해양소설을 집필한다. 그 중 첫 번째인 [레드번](Redburn, 1849)은 10년 전 리버풀로의 항해에 기초한 것이고, 두 번째 작품인 [화이트재킷](White-jacket, 1850)은 미국 군함인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호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이 두 작품은 멜빌의 대중적 인기를 회복해주었지만, 멜빌은 편지에서 이 작품들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쓴 "두 일거리"일 뿐이며 자신이 쓰고 싶은 책은 대중적으로 실패하는 종류의 책이라고 말함으로써 대중성과 자신의 예술성 서이의 갈등을 토로한다.
멜빌은 다음 작품으로 아직 활용하지 않았던 포경선에서의 경험담을 기획한다. 그의 영국인 출판업자인 리처드 벤틀리(Richard Bentley)에게 보낸 편지에서 멜빌은 이 작품이 2년간 포경선에서 작살잡이 경험에 기초한 향유고래잡이에 관한 모험담이라고 밝히지만 이 작품 역시 1년 이상의 세월 동안 크게 개고되어 원래의 모험담과 다른 작품으로 변모하는데 이것이 바로 걸작 [모비딕](Moby-Dick, or the Whale, 1851)이다. [모비딕]이 수정되는 동안 개인적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탐닉하고 호손과 교제한 한편 사회적으로는 노예제에 얽힌 커다란 혼란이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최종적으로 수정된 이 작품이 지니는 다층성과 복합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어서 멜빌은 젊은 귀족 피에르의 방황과 좌절을 그린 소설 [피에르](Pierre, or The Ambiguities, 1852)를 쓰게 되지만 이 작품은 독자에게 철저히 외면당하고 대중작가로서 멜빌의 명성은 크게 훼손된다.
멜빌은 그 후 [하퍼즈 매거진](Harpers Magagine)과 [퍼트넘즈 먼슬리](Putnams Monthly)에 [필경사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와 같은 단편들을 익명으로 발표하고, 망명생활을 하게 되는 독립전쟁의 영웅을 소재로 한 [이즈리얼 포터](Israel Potter)와 노예의 선상반란을 소재로 한 [베니토 써레노](Benito Cereno)를 퍼트넘즈 먼슬리에 1854-55년 사이에 연재한다. 멜빌은 자신이 발표한 중단편들을 모아 1856년에 [피아자 이야기](The Piazza Tales)로 출판하고 이듬해에 최후의 장편소설이며 미국사회에 대한 냉소적 풍자인 [사기꾼](The Confidence-Man)을 발표한다. [사기꾼]은 대중적으로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작가로서의 생명에 종지부를 찍게 한다. 이후 멜빌은 남북전쟁 후 출판한 전쟁시 모음집과 1857년 예루살렘으로의 성지순례여행을 소재로 20여년 후인 1876년에 출판한 [클레럴](cLAREL)이라는 장시, 그리고 두 권의 시 모음집 및 1891년 죽기 전에 미완성으로 남긴 [선원 빌리 버드](Billy Budd, Sailor)를 제외하고는 절필하고 생애의 마지막 20여년을 거의 뉴욕시 세관의 검사관으로 지낸다.
그러다가 1919년 그의 탄생 백 주년에, 문학자들이 멜빈의 생애와 작품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많은 논문과 저술을 발표하자, 하루 아침에 19세기 미국의 작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작가로 인정받게 된다.
2. 허먼 멜빌의 작품
【장편】
《타이피족(族) Typee》(1846)
《오무 Omoo》(1847)
《마디 Mardi》(1849)
《레드번 Redburn》(18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