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과제 2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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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장면 과제 2 공화국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899년에 태어난 장면은 청장년기를 일제 치하에서 보냈다. 5년간의 유학 생활을 포함한 교육기를 제외하더라도 1925년부터 1945년까지 약 20여 년 동안 일제의 지배를 경험한 것이다. 그러나 장면은 회고록에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이 청장년기에 관해 아주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나는 미국 유학시의 은사이며 천주교 평양교구장인 방 주교를 보좌하고자 평양교구로 가서 교구 일을 맡아보면서, 교구재단의 확립 등으로 약 5년간을 지내고 서울로 올라와 동성상업학교의 일을 보게 되었다. 동성학교에서 나는 17년간 교육 사업에 종사하면서 그동안 강당도 세우고, 불타 버린 본교사도 재건하여 그 건물과 함께 나도 늙으며 매년 배출되는 대견한 제자들을 사회 각 방면으로 보내는 것으로 낙을 삼으며 살아왔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말을 고하고, 우리 한민족이 일제에서 해방되면서 나도 동성학교를 떠났다”(《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28쪽).
20여 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이렇게 짤막하게 요약해 버린 까닭은 무엇일까? 특기할 만한 무엇이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무엇이 있었기 때문일까? 인천세관에서 일하던 장기빈(張箕彬)의 장남으로 태어난 장면은 인천 박문학교를 거쳐 수원농림학교(서울농대 전신)를 마치고, 다시 YMCA 기독교청년학관 영어과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천주교 소신학교에서 국어·산수·역사·지리·과학 등을 가르쳤다. 장면은 이 시절에 3·1운동을 맞게 되는데, 이에 관해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때에 3·1운동이 일어나고, 나도 만세를 부르고 다니다가 그 다음 해에 미국으로 건너갔다(《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27쪽). 이 기록에 따르면 장면은 3·1운동에 동참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와 관련해, 현석호(玄錫虎)는 장면이 당시 만세 소리를 들으면서 평상시의 그와 달리 격앙된 어조로 조국의 현실을 비판하였다고 지적하고 있으며(《한국인물대계 : 장면》, 39쪽), 당시 학생이었던 노기남(蘆基南) 주교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이때의 독립 운동에 대해서 신학생들에게 이를 알려 준 사람이 곧 장 선생이었으며 그 외에 외부와 단절된 학교 생활에서 신학생들에게 바깥 세상의 소식을 전해 주는 것도 장 선생이었다. 장 선생의 이야기는 민족과 신앙에 대한 것들이 많았다.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져서 뜻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해외에 나가 독립 운동을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도 이야기를 해주고,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도자인데 그러한 지도자를 우리는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우리의 진정한 지도자는 천주님인데 그걸 모르고 있는 사람들을 일깨워 주어야 하겠다는 것, 맨주먹으로야 왜놈들의 총칼을 당해낼 수 없지만 신앙심과 천주님에 대한 기도 앞에선 그들도 무력해질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모든 동포에게 천주님을 믿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하겠다는 것 등등의 이야기를 해준 사람도 장 선생이었다.……3·1운동이 일어나자 신부 지망생인 신학생들도 밖에 나가 만세를 부르려고 했었다. 그러나 일제와의 마찰을 꺼렸던 학교 당국의 강경한 반대로 좌절되고 말았다.……그 날 장 선생은 흥분이 되어 있었고 신학생들은 공부가 되지 않았다. 수업을 하는 대신 3·1운동에 대한 것들을 듣기도 했다(《명동성당》, 73∼74쪽).
장면은 또 3·1운동이 천주님의 뜻이며, 독립과 민족의 얼을 찾도록 천주님께서 기회를 주신 것이라는 것과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우리의 독립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세계 인류는 우리를 기억할 것이며 천주님은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3·1운동에 참여하고, 민족 현실에 비분강개하던 애국청년 장면은 왜 친일 대열에 가담하였을까? 우리는 그 씨앗을 먼저 그의 사고에서 찾을 수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드러나듯이, 장면은 망국과 일제 탄압이라는 정치적 현상마저도 종교로 수렴될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장면 총리의 비극」, 『신동아』, 1984년 2월호). 3·1운동은 그 낙관적인 비폭력 노선으로 말미암아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이었다는 비판도 받고 있거니와, 장면은 종교적 침잠을 옹호하는 한편 여기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 신앙심과 기도로 총칼을 물리칠 수 있다는 현실도피적인 논리를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학생들을 희생시키지 않으려는 스승의 배려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치열한 투쟁과 자기 희생으로부터 벗어나 일신의 안녕을 도모하려한 우유부단한 지식인의 자기합리화 논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점은 유학 시절의 행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장면이 유학 생활을 보낸 1919년에서 1925년 사이에 미국에는 서재필(徐載弼), 안창호(安昌浩), 이승만(李承晩), 박용만(朴容萬) 등 해외 독립 운동가들이 나름대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당시 민족 독립을 꿈꾼 많은 젊은 유학도들이 이들 주위에 몰려들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소신학교 시절 어려운 환경 속에서 전개되고 있던 해외 독립 운동에 경의를 표하던 장면이 유학중에 이들 미주 한인 사회의 광복 활동과 연계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해외 독립 운동에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기보다 그는 오로지 학문 연구와 신앙 생활에만 몰두하였으며, 학업을 마친 뒤에도 미국에 남아 망명 독립 운동을 하기보다 국내에 돌아와 자신이 배운 학문과 신앙 지식을 전파하는 길을 택하였다. 행동하는 사람이 아닌 기도하는 사람(?) 장면은 현실투쟁적이기보다는 현실도피적이었으며(「장면 총리의 비극」, 『신동아』, 1984년 2월호). 이러한 측면에서 일찍부터 현실로 존재하던 힘인 일본 제국주의에 무장 해제당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장면에게 친일 또는 부일은 이미 예정된 일이나 다름없었다.
카톨릭계 대표로서 행한 친일행위
1929년부터 카톨릭 재단의 동성상업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한 장면은 1936년부터 1945년까지 교장직을 역임하였다. 이 사이에 시인 정지용(鄭芝溶) 등과 더불어 1933년부터 『카톨릭 청년』이란 잡지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이 『카톨릭 청년』에 장면은 「성자와 독신 생활」「구약성경의 역사적 가치」「순교의 의의와 가치」「교회의 유일성」「옥스포드 운동 전망」「면죄부의 진상」「교회의 신성성」「이단일속」「영국 성공회」「장로교회」등 순수 종교 관련 글들을 발표하였다. 이 당시까지 장면의 특별한 친일행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동성학교 교장 시절 일본인 교무주임을 내쫓았다는 유동진(柳東璡)의 기록이 있을 뿐이다.
내가 동성학교에 갔을 때로 말하면 일인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일인 교사 10여 명에 비해 우리나라 교사는 서무까지 합쳐서 겨우 4,5명 꼴이었다.……장 박사가 서무주임으로 들어온 것은 재단이사측이 카톨릭에서 장차 그 분을 모실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학교 교육 방침이나 기타 모든 것은 일인들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었다.…… 당시 동성의 교무주임은 사이고라는 일인이었는데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는 총독부에서 비밀리에 내보내진 사람으로 학교의 운영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다. 이를 평소부터 못마땅하게 여긴 장 박사는 교장이 되자, 그를 학교에서 쫓아 버렸다. 일인 천하에서 더구나 총독부에서 비밀리에 보낸 사람을 한국인 쫓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362쪽).
유동진은 마치 이를 대단한 항일행위라도 되는 듯이 묘사하고 있으나, 장면의 동기가 민족 의식의 발로에 있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학교의 관리 책임자로서 충분히 행할 수 있는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여간, 이러한 용기있는(?) 행동도 불사한 장면은 이 일이 있은 지 오래지 않아 친일 대열에 가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