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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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재조명
대한민국 건국 이후 50년 이상 지나게 되어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1875∼1965)박사의 인간과 업적을 거시적 안목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재조명의 필요성은 세가지다. 세계사적으로 동·서냉전이 종식되면서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동·서냉전 중 북한이나 소련측을 옹호하던 수정주의 사관이 쇠퇴했음이 그 첫째 이유다. 수정주의 사관은 냉전의 원인이 미국의 대소(對蘇) 봉쇄정책에서 비롯됐다는 관점으로 자연히 북한측에 유리한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이승만을 부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다음 이유로 이승만정권과 이승만 이후 국내 정치상황에 대한 평가다. 4·19이후 허정·장면정권에서 시작해 김영삼정권에 이르기까지 남한에서 민주주의 정치는 아직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승만 정권의 ‘독재’는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평가받게 됐다. 마지막 이유로 새로운 사료의 발굴을 들 수 있다. 옛소련 붕괴 후 러시아나 중국 및 한국측에서 새로운 자료들이 속속 발굴됨으로써 이승만을 새롭게 재평가할 많은 자료가 확보되었다. 이승만 박사는 언론인·학자요, 기독교 교육자요, 독립운동가요, 건국의 주역으로 대한민국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지만 대체로 부정적 평가가 우세했다.「사상계」의 발행인이었던 (고)장준하 선생은 이승만을 “간악하고 노회하며 교활하기 짝이 없는 희대의 협잡꾼”이라고 폄하했다. 또 이승만 집권시절 유명한 논객이었던 신상초 선생은 65년에 쓴 ‘이승만론’에서 “이 사회를 비뚤어지게 만든 최대 책임이 그 「이승만」에게 있으며, 「그는」 권모술수에 능한 궁정정치인”이라고 깎아내리면서 “그의 공과(功過)는 공 3, 과 7”이라고 말했다. 부정적 평가의 요인으로 크게 남북분단 책임설과 6.25전쟁 도발설을 들 수 있다. 분단 책임설은 해방후 남한에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함으로써 남북분단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전쟁 도발설은 맥아더와 덜레스가 장개석 등과 공모, 6.25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책임론은 이제 학문적으로 완전히 논쟁이 끝난 상태인데, 남북분단 책임론의 경우 김일성이 소련 군대의 지원을 받아 이미 1946년에 38선 이북에 사실상의 단독정부를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한에서도 불가피하게 단독정부 수립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두번째, 전쟁도발설의 경우 브루스 커밍스 등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인데 최근 소련이나 중국 등의 자료를 통해 김일성이 스탈린과 마오쩌등(毛澤東)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밖에 정부나 경찰 및 군대에 친일파를 기용했다는 점, 장기집권을 위해 변칙적으로 헌법을 개정(52, 54년)한 점 등이 부정적 평가 요인으로 꼽힌다. 또 반공법 등을 통한 반대세력 거세 및 거창양민학살사건, 국민방위군사건, 부정선거 실시, 경제발전 무관심, 부패 만연, 김구 선생 암살 조종혐의, 고집불통의 성격과 고령의 나이, 외국인 부인을 둔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지적들은 맞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이승만에 대한 균형있는 판단을 위해 그의 생애를 거시적으로 재조명해 보자.
우선 독립운동가(1904-1948)로서 이승만을 보자. 그는 조선조 태종의 큰아들인 양녕대군의 18대손으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왕족 출신이었지만 왕족이나 양반임을 내세워 자랑하지 않았고 족보 따지기를 싫어했다. 어린 시절에 한학을 수학한 후 갑오경장(1894) 뒤에는 배재학당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연마하였다. 그의 남다른 총명은 배재학당 입학후 6개월만에 영어 조교사가 되고, 2년간의 수업을 마치고 졸업하는 식장에서 6백여명의 귀빈을 모아놓고 영어로 연설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한국의 독립’이란 제목으로 행한 이 때의 연설은 아마도 한국인이 행한 최초의 영어 연설이 아니었는가 싶다. 졸업 후 순 한글신문 「매일신문」을 창간한 그는 언론을 통해 개혁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과격한 개혁을 주장한 결과 5년 반의 영어(囹圄)생활을 하게 된 청년 이승만은 감방 안에서 수십편의 신문논설을 썼다. 그런가 하면 영한사전도 만들었다. 그가 저술한 국문책은 세권이다. 수감중 발표한 논설을 바탕으로 쓴 「독립정신」, 청일전쟁이 한국역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를 논한 「청일전기」(淸日戰記), 한국 기도교인들에 대한 일제의 핍박상을 다룬 「한국교회 핍박」등이다. 이외에 작은 번역서 세권이 더 있다. 이 책들은 모두 수작이다. 특히 청일전쟁이 한국 근대사를 결정짓는 사건이었다는 해석은 그가 역사를 보는 형안을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청일전쟁에 대한 한국인의 서술은 희귀한데 이승만의 책은 그중 하나였다. 이같은 저술 외에도 그는 자신이 참여·주도한 회의의 회의록을 반드시 팸플릿 형식의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이화장에는 세계 어느 나라 대통령 못지않게 많은 자료가 남아 있다.
1) 이승만은 동·서양에서 보기 드문 천재였다. 영어를 단기간에 마스터한 것을 물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기전까지 5년밖에 안 걸렸다. 그는 조지 워싱턴대·하버드대·프린스턴대에서 각각 학사·석사·박사를 마쳤다. 실력과 함께 배짱도 두둑했던 그는 하버드대와 프린스턴대 입학시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한국에 많기 때문에 2년 내에 박사학위를 안 주면 입학하지 않겠다”는 협박성(?) 제안을 했다. 하버드대서는 그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지 않았고, 프린스턴대는 수락했다. 그렇지만 이승만의 논문은 절대 부실하지 않았다. 그의 논문은 프린스턴대 출판부에서 1912년 출간됐다.
2)개혁가·교육자·외교관 등 독립운동가로서의 업적을 살펴보자. 그가 청년기에 5년반의 감옥생활을 한 것은 급진적인 개혁 주장으로 고종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때문이었다. 일본·중국·러시아 등 열강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그는 영국 내지 일본에서와 같은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 고종이나 그의 아들(의친왕)을 상징적 왕으로 모셔놓고 내각과 총리대신에게 실권을 주자는 아이디어였다. 이로써그는 고종의 노여움을 사 투옥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기독교를 통해 한국민족의 부활을 도모했다. 단기간내의 주권 회복은 불가능이라 판단하고 도덕적·정신적인 민족개조 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그는 미국 유학중에도 항시 신학을 부전공으로 택했고 목회장학금을 수령했다.이승만은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YMCA에서 ‘학감’으로 일했는데 그때 그는 전국을 누비면서 교회와 학교를 중심으로 전국적 YMCA 청년망을 조직하는데 열중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 주목받지는 않았지만 이승만은 이른바 ‘105인 사건’의 단초를 제공했다.
일제가 다스리는 식민지 한국에서 활동이 어려워진 이승만은 하와이의 호놀룰루로 망명했다. 그의 망명지 선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군사력이 아닌 문필과 외교의 힘으로 독립을 추구했던 그는 세계 최강국으로서 한반도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열쇠를 쥐고 있다고 판단된 미국을 그의 망명지로 택했다. 그리고 미국의 여러 지역 중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하와이에 자리잡았다.
3) 교포들을 교육·세력화해 독립의 세포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만약 그가 안락한 삶을 추구했다면 뉴욕이나 워싱턴 등지를 택했을 것이다.
4) 하와이에 정착, 30여년 체류한 이승만은 그곳에서 국내와 마찬가지로 언론인·교육자·(준)목회자로서 조국 독립을 위해 일했다. 언론의 위력을 익히 간파한 그는맨 먼저 「태평양 잡지」를 발간하여 교포들을 계몽했다. 또 ‘한인기독학원’의 원장으로 교육활동을 했다. 1946년에 사용한 그의 여권 직업란에 자신의 직업을 ‘교육자’로 쓴 것을 봐도 교육에 대한 그의 집념을 읽을 수 있다. 기독교 지도자로서 그는 감리교 선교부와 결별하고 호놀루루에 순전히 한국적 교회를 창립, ‘한인기독교회’의 선교부장직을 맡았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후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직을 맡아 정치가·외교가로 활약했다. 그는 임시정부의 기구들을 만들고 지도체계를 수립했으며, 미국·영국·프랑스 등 강대국을 상대로 외교·홍보활동을 전개했다. 이 같은 활동을 위해 그는 미국대학에서 공부한 똑똑한 젊은이들을 골라 기용했는데, 이러한 인사정책으로 말미암아 다른 ‘노련한’ 독립운동가들과 사이가 소원해졌다. 아무튼 그는 주어진 직책에 최대한 충실하면서 완벽한 임무완수를 위해 항시 쉬지 않고 일했다. 특히 ‘대한공화국’의 대통령 명의로 발송하는 외교문서를 작성할 때 그는 미국인 변호사를 고문으로 모시고, 문서상의 완벽을 기했다. 이렇게 그는 미국 대통령, 영국총리 등과 대등한 수준에서 외교 업무를 수행한 것이다. 다음으로 건국한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대통령으로서 그의 업적을 살펴보자. 정부수립에 앞서 헌법을 제정하는데 중추역할을 담당했던 그는 한반도 안에 최초로 공화제 민주주의정부를 탄생시켰다. 헌법 기초시 유진오 박사와 한민당계에서는 내각책임제를 원했으나 이승만은 이 제도가 조선조의 의정부 중심 제도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미국식 대통령제를 고집해 이를 관철시켰다. 이후 우리 현대사를 보면 신생 한국에는 대통령제가 더 적합했다는 생각이 든다. 외교면에서 이승만의 최대 업적은‘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이다. 이는 우리 역사상 김춘추의 대당외교나 서희의 ‘강동6주 담판’보다 더 값진 근대외교사상 가장 돋보이는 업적이다. 1883년 고종이 미국에 사절을 보낸 이래 한국은 근대 1백년 동안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보호막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발표 성명서에서 이승만은 “우리 국민들이 앞으로 이 조약의 혜택을 대대손손 누리게 됐다”고 말했다. 미국의 핵우산 아래 안보를 보장받음으로써 마음놓고 정치·경제·문화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한국 번영의 기틀을 마련한 이 조약은 이승만이 6·25전쟁의 막바지에서 미 국무차관 로버슨과 2주간의 협상 끝에 얻어낸 결과였다. 국군을 65만 대군으로 키운 것도 이승만의 업적이다. 이에 힘입어 한국은 668년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최대의 군사력 보유국가가 되었다. 고종시대 국모(명성황후)의 침실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를 당한 것도 따지고 보면 군사력이 부족한 탓이었다. 부국강병을 외쳤던 고종은 근대적 군대를 키우려 했지만 돈과 실력이 부족해 한낱 꿈으로 끝났다. 일제 병탄시 우리 나라의 군사력은 8천여명에 불과했지만 6·25전쟁 이후 동아시아내 정상급 수준으로 팽창한 것이다. 이승만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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