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행상 과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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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행상 과민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조선시대에 상인은 대체로 서울 육의전의 시전상인과 객주 및 여각 ,관수품을 조달한 공인, 지방의 보부상으로 나뉜다. 우리는 조선의 가장 하부에서 움직이는 유통상인인 행상의 삶은 어떻게 발전했으며 변화해 갔는지와 민란을 통해 당시 조선사회에 누적된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조선시대의 행상
조선은 농업을 중시하고 상공업을 천시하는 정책을 썼지만 여전히 상업은 발전했다. 당시의 농민들은 자급자족할 수 없는 수공업제품이나 소금생선건어물 등 각종 물품을 상인을 통해 구입했다. 이러한 농촌 상업은 정부의 정책뿐 아니라 농민의 상품 생산이나 구매력 수준 향상, 유통기구 발달과 관련해서 장시라는 농촌시장의 탄생과 발전으로 연결되었다. 조선시대에도 큰 도시에는 정부에서 설치한 상설점포인 시전이 있었으나 일반백성들이 물건을 거래하는 장소는 아니었고 대다수 지방 농촌에는 아무런 상설점포가 없었다. 아직 장터가 없었던 때 마을과 마을을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사람을 행상이라 하는데, 그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건을 교환을 통해 구했던 시기 이후부터는 늘 존재하였고, 시기가 내려와 잉여생산물이 증가하고 사회 분업의 폭이 확대될수록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행상은 대개 소량의 상품을 짊어지고 각지의 장시나 민가를 돌면서 소매하는 보부상을 말한다. 보부상은 다시 약장신구종이처럼 부피는 작아 가볍지만 값은 비싼 상품을 보에 싸서 행상하는 봇짐장수 또는 항아장수라 불린 보상과, 생선소금토기처럼 무게나 부피는 크지만 값싼 상품을 지게에 짊어지고 행상해 등짐장수라 일컬어진 부상으로 구별되었다.
행상의 상업은 장이 서고, 포구 상업이 발달하는 등 지역 내 유통기구가 형성되면서 많은 변화를 맞게 되었다. 15세기말에는 교환을 통해 흉년을 이겨내려고 장이 서게 되었다. 15세기 후반 처음 모습을 보인 장시는 점차 삼남 전지역과 경기도 등지로 확산되었고, 애초 출현할 당시 15일이나 10일 간격이던 개시일도 점차 5일 간격으로 조정되었다. 16세기 중엽 명조대에는 지방 군현에서 날짜를 달리하여 번갈아 장시가 서는 경우가 있어 도적이 들끓었다고 한다. 이러한 장시 확산 추세는 17세기 말, 18세기 초 이후에 더욱 두드러져 산간지역에도 장이 서게 되었다. 이 시기 화전민이 산간지역을 개발하여 산촌이 발달하는 등 인구 확산이 두드러졌던 것도 장시가 확산되는 한 배경이었다.
행상은 조선초기부터 자신들의 상업활동에 오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행상단체를 만들었는데 특히 조선후기에는 대상인의 횡포와 관청의 수탈로부터 영세한 행상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보부상단을 조직하였다. 보부상의 조직은 일종의 협동조합과 같은 것으로 상호간의 규율을 중히 여겼다. 이 보부상은 물론 상인들의 조직이었지만, 비상시에는 정부에서 전령 혹은 치안의 일을 거들게 하기도 하였다.
행상들이 팔고 다니는 물자를 연결하는 중개인은 객주였다. 이들은 포구에 머물면서 선박으로 들어오는 대량의 물자를 받아 각 지역을 순회하는 행상들에게 연결해주었다. 포구는 선박이 출입하는 원격지 유통의 중심지였다. 객주와 객상, 즉 객주와 행상간의 관계는 초기에는 구속력이 없었으나 그 관계가 구속력이 생기면서 주인권이라는 새로운 권리가 생겼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를 전후하여 주인권은 크게 성장하였는데 처음에는 개별 색상에 대한 것이었지만 점차 특정지역 전체에 대한 권리로 확대되었다. 객주가 머무는 포구의 상품 유통량의 증가와 객상에 대한 지배력이 강화되자 객주의 수수료 수입의 증가로 주인권의 가격이 상승하였기 때문에 18세기 말 이후에는 대자본 소유자라야 객주가 될 수 있었다.
이처럼 객주는 행상들의 중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금융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는 보부상을 장터를 순회하는 상인의 대표 격으로 알고 있지만, 보부상은 행상 중 자신들의 조직을 군현이나 비변사 등에 공인받고 독점권을 행사하였던 일부 사람들이다. 보통 행상들은 장을 도는 장돌뱅이일 뿐이었다. 장돌뱅이는 농업을 위주로 한 조선사회가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람들이었다. 전형적인 행상인 장돌뱅이는 행상활동에서 많은 이득을 거두지는 못했기에 가난한 영세 상인에 머물러야 했다. 전국의 각처를 돌아다니는 행상의 활발한 활동은 조선의 교통로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등짐을 메고 이곳저곳을 돌아 다녔기에 병이 나면 간호해 줄 사람도 없고 죽으면 땅에 편안히 묻히는 것조차 장담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조선시대의 민란
19세기는 민란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도처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19세기 초 홍경래의 난을 필두로 시작된 민란은 19세기 중반에는 조선팔도 전역이 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19세기말에는 조선왕조의 총체적 모순에 도전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단순히 부패한 관리만을 척결하기 위해 시작된 민란은 점차 조선왕조의 근본적인 모순을 인식하는 데까지 나아갔고, 계속되는 민란으로 조선왕조는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민란 이전에 피지배층은 유언비어의 유포, 괘서나 흉서를 유포, 비밀결사체 조직 등으로 소극적인 형태의 저항이었지만 민란이 발발할 수 있는 토양을 형성해 주었다.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이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1811년 12월 18일, 평안도 지방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 그는 몰락한 양반 출신이었는데,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자 몇 번이나 과거에 응시했다. 그러나 매 번 과거에 낙방하고 말았다. 그것은 그가 관서(평안도)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평안도 사람들을 심하게 차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홍경래는 10여 년 전부터 조선 사회에 불만을 가진 세력을 모았다. 우군칙과 김창시, 홍총각 등이었다. 이들 뿐만 아니라 평안도 지역의 많은 백성들이 홍경래의 뜻을 따랐다. 홍경래와 그 무리들은 무려 10년 동안이나 치밀하게 난을 준비했다. 그리고 1811년 12월 18일 드디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홍경래가 이끄는 군은 열흘 만에 곽산, 정주, 선천 등을 점령했다. 그러나 곧 관군의 박격이 시작되었고 결국 홍경래가 이끄는 군은 관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정주성으로 쫓겨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자 관군들은 정주성 주변의 백성들도 그들과 한패라면서 무자비하게 죽이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정주성으로 몰려들었다. 4개월이 넘도록 끄덕하지 않던 정주성은 관군이 매설한 화약으로 폭파하여 결국 홍경래 등 주모자들은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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