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사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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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BC 37년에 주몽(朱蒙)이 이끈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佳江:渾江) 유역에 건국하였다고 한다. 고구려는 일찍이 기마민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졸본 지방에서 일어나 동방 침입의 요로인 퉁거우[通溝]로 옮긴 뒤 낙랑군과 임둔군(臨屯郡)의 교통로를 단절시키는 등 한족(漢族)과의 투쟁과정에서 강대해졌다.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된 이후 현도군(玄郡)의 지배권 안에 있었으나 태조왕(太祖王:재위 53∼146) 때부터 강력한 대외발전을 꾀하였다. 태조왕은 현도군을 쳐서 푸순[撫順] 방면으로 축출하였고, 요동군(遼東郡)과 낙랑군(樂浪郡)을 공격하여 청천강 상류까지 진출하였으며, 임둔군의 옛 땅에 자립한 옥저(沃沮)와 동예(東濊)를 복속시켜 동해안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는 왕위의 형제상속제를 확립하여 고대국가체제를 갖춤으로써 고구려의 실질적인 시조가 되었다.
고국천왕(故國川王:재위 179∼197)은 왕위의 부자상속제(父子相續制)를 마련하였고, 5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는 등 체제 정비를 단행하여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다. 동천왕(東川王:재위 227∼248) 때는 중국의 위 ·오(吳) ·촉(蜀) 3국의 대립시기였는데, 이때 동천왕은 요동군의 실권자 공손 연(公孫淵)과 통교하고 위나라를 견제하는 등 국제적 안목을 넓혔으나, 242년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다가 관구 검(丘儉)의 반격을 받아 서울인 환도성(丸都城)까지 함락되었다. 봉상왕 때는 선비족인 전연(前燕)의 모용외(慕容)의 침입을 두 차례 받는 등 위기를 겪다가 313년 미천왕(美川王:재위 300∼331) 때는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 한반도에서 한사군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2. 영토확장과 전성기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재위 371∼384) 때 불교 공인과 태학(太學) 설립(372), 율령(律令) 반포(373) 등으로 국가체제 정비와 정치적 안정기반이 구축되었다. 이와 같은 단계에서 즉위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은 정복 군주로서 백제의 한성(漢城)을 침공하여 임진강과 한강선까지 진출하였고, 신라 내물왕(奈勿王)을 원조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북으로는 후연(後燕)을 쳐서 요동(遼東)을 차지하고 숙신(肅愼)을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장수왕(長壽王)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제도의 정비와 대외정책의 확대 등으로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중국의 남 ·북조(南北朝:北魏 ·宋)와 통교하였고, 유연(柔然) 등 새외(塞外) 민족과도 통교하면서 외교관계를 확대하여 중국을 견제하였다. 427년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수도를 고조선의 문화 유산지인 평양으로 천도하여 집권적 정치기구를 정비하고 국력을 신장시켰다.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낀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羅濟同盟)을 체결하였다. 472년(개로왕 18) 백제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의 남침을 막기 위해 군사를 청하기도 하였다. 장수왕의 남하정책의 목표는 한강 유역이며, 그 요충지는 충주(忠州) 지방이었다. 475년 결국 그는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여 함락하고 개로왕(蓋鹵王)을 패사(敗死)시켜 고국원왕(故國原王)의 한을 풀고 아산만(牙山灣)까지 진출, 한강 유역을 지배하였다. 이때 백제는 수도를 웅진(熊津:공주)으로 옮기고,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신라는 죽령(竹嶺) 이북의 땅을 잃었다.
장수왕의 뒤를 이은 문자명왕(文咨明王)은 494년 부여(夫餘)를 복속시켜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중국과 자웅(雌雄)을 겨루었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와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가 당시의 광대한 판도를 밝혀주고 있다.
3. 수·당과의 투쟁
6∼7세기 초의 정세를 보면, 589년 나제동맹이 체결되고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북진정책을 취하였으며, 위(魏) ·진(晉) ·남북조로 분열된 중국을 589년 수나라가 통일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遼東)에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때 동아시아의 정세는 돌궐(突厥) ·고구려 ·백제 ·일본을 연결하는 남북 진영과 수(隋:후에는 唐)나라와 신라가 연결하는 동서 세력으로 갈라져 대립상태에 놓였다.
고구려 영양왕(陽王)은 진흥왕의 북진 정책으로 한강 유역 및 함경도 일대를 상실하자 남하정책을 포기하고 서진정책(西進政策)을 단행, 요서(遼西) 지방을 공격함으로써 수나라와 충돌하였다.
598년(영양왕 9) 수나라 문제(文帝)는 수륙군(水陸軍) 30만으로 침입하였으나 고구려의 반격과 질병 ·풍랑으로 퇴각하였다. 그 뒤 수나라 양제(煬帝)는 돌궐족을 복속시킨 뒤, 612년 113만 대군으로 요하(遼河)를 건너 요동성(遼東城:遼陽)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군의 강력한 항전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 양제(煬帝)는 다시 약 30만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왔으나,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살수(薩水)에서 섬멸함으로써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이었다.
이로써 수나라는 618년 내란이 일어나서 망하고 당(唐)나라가 건국되었다. 이때 고구려는 당나라와 대립하고 돌궐등과는 내왕하였기 때문에 당나라 태종(太宗)이 즉위하면서 고구려에 침입하려는 야심을 보이자, 고구려도 다롄[大連]과 부여성(눙안)을 연결하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기 시작하였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정권을 잡은 뒤부터는 당나라에 대한 태도가 더욱 강경하였고, 당나라와 연결한 신라를 백제와 더불어 자주 공격하였다. 한편, 당나라는 돌궐을 복속시키고 서역(西域)을 평정하였으며, 고구려의 세력권 내에 있던 거란족을 꾀어 고구려를 배반하게 하는 등 침공태세를 갖추었다.
645년(보장왕 4) 당나라 태종은 이적(李勣:李世勣) ·장량(張亮)을 앞세우고 30만 군으로 요하를 건너, 50만 석의 군량이 있는 요동성을 점령하여 전진기지로 삼고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약 60일 사투(死鬪)하여 당나라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 뒤에도 당나라는 2차 ·3차(647년 ·648년)에 걸쳐 이적 ·우진달(于進達) ·설만철(薛萬徹) 등을 보내어 침입하였으나 실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