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전주의 이후의 케인즈학파의 흐름

 1  신고전주의 이후의 케인즈학파의 흐름-1
 2  신고전주의 이후의 케인즈학파의 흐름-2
 3  신고전주의 이후의 케인즈학파의 흐름-3
 4  신고전주의 이후의 케인즈학파의 흐름-4
 5  신고전주의 이후의 케인즈학파의 흐름-5
 6  신고전주의 이후의 케인즈학파의 흐름-6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신고전주의 이후의 케인즈학파의 흐름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영국의 경제학자로서 "확립론"의 연구에 몰두하다, 알프레드마샬이 은퇴하던 1908년 켐브리지 대학의 특별 연구원이 되어,화폐론 강의를 시작한다. 왕립 인도 통화금융 심의회(1913-1914),재경부(1915-1919)에도 관여하다 제1차대전후의 강화회담에 재경부 대표로 참가하여, 강화조약 중 특히 배상안의 모순을 지적하였지만,받아들여지지않자 사퇴를하였으며,이후 "평화의 경제적 귀결(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1919)"을 발표하여 일약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제2차 대전이 일어나자 즉시 재경부에 영입되어 인도 은행을 담당하게 되고,이 기간 중,국제 통화기금의 설립과 영미 금융 협정 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경제학자로서 처녀작은 "인도의 통화와 금융(Indian Currency and Finance, 1913)"으로서 이후 몇몇 작품을 남기지만, 뭐니뭐니해도 "케인즈 혁명"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독창성이 빛나는 작품은 "고용,이자 그리고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 1936)"일 것이다.
그 책에서 케인즈는 고전학파의 이론을 실업이 존재하지 않는 특수 상황에서나 통하는 특수 이론이라고 몰아 붙였다. 그리고 고전학파에서 그렇게 중시하던 공급을 제쳐놓고, 케인즈는 마르크스처럼 소득 불균형으로 생긴 노동자들의 소득 감소로 소비 수요가 부족해지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어떻든 공황의 원인을 일찍이 말더스가 지적한 것과 같이 수요 부족에서 찾았다. 마르크스는 공황이 심화되어 결국 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무산 노동자 계급의 봉기로 붕괴되는 것이 역사의 필연이라고 했다. 그러나 평소 마르크스를 우습게 알았던 케인즈는 세계 대공황의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자본주의 체제를 구출해 낼 방안을 찾고 있었다. 그의 진단은 마르크스와 같았지만 그가 내린 처방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정부가 나서서 문제가 되는 유효 수요의 부족을 채워 주기만 하면 대량 실업의 경제적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고전학파 이론의 기저에는 자유 방임주의 사상이 깔려 있음은 물론이었다. 이 이론에서는 정부가 민간 기업 활동에 간섭하는 것은 곧 경제에서 효율을 떨어뜨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최소 정부만이 최선의 정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케인즈는 이런 정부로 하여금 총수요를 확대하라니 그것은 고전학파의 자유주의 정신을 근본부터 부정하는 것이었던가?
케인즈도 정부가 민간 경제를 간섭하여 민간의 자유를 해쳐도 괜찮다고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선 대공황이라는 급성 폐렴에 걸려 빈사 지경에 있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부터 급한 대로 살려 놓고 봐야 할 때였다. 자본주의 체제가 무산 노동자 계급에 의해 타도되기 전에 불가피 정부가 나서서 실업을 구제하고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여 체제 붕괴부터 막고, 스스로 불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야만 했다.
30년대 세계 대공황이라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급성 폐렴을 케인즈는 정부를 부려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리 평화 회담에서 꿈꿨던 케인즈의 신유럽 구상은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케인즈 자신도 참여한 미국 뉴햄프셔주의 휴양지 브레튼 우즈에서 44개국 대표들이 결정했던 전후 세계 통화 체제의 구축 그리고 전쟁 피해 복구를 위한 미국의 거대한 원조 계획 마샬 플랜(the Marshall Plan) 실시 등으로 꽃을 피웠다.
2. 케인즈 학파의 이론과 현대적의의
1929년에 시작된 세계공황에 의해 일기 시작한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학파로,케인즈의 경제 이론을 이어 받아,정책면에서는 국가에 의한 유효 수요의 증감 조절을 통해 대량 실업과 불황의 완화를 도모하고,자본주의의 수정을 추진하려 하였다.
이러한 케인즈 주의(케니지언)는 점차로 흔히 말하는 좌파와 우파의 두 갈래로 나뉘어지기 시작한다.우선,우파(右派)의 경우,이자율을 중앙은행에서 조절하여 민간 투자를 자극할 것,동시에 정부가 유효 수요를 증가시키기 위해 군수(軍需)지출을 적극적으로 행하고,민간 기업에 토목 사업을 발주시키거나 민간 투자 증대를 위해 각종 보조금을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함으로 완전 고용 정책을 추진하려 하였다.이 입장은 당초 케인즈 정책에 반대했던 기업가 측에 받아들어져,영국에서는 보수당,미국에서는 2차 대전후의 공화당내에 많은 지지자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둘째로 케인즈 좌파의 경우는,유효수요를 증가 시키기 위해서 소득과 부의 평등화를 지향하는 한편 투자 내용을 계획화,사회화함과 동시에 정부 투자를 사람들의 사회복지 증대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행할 것을 주장하는 입장이었다.즉,국가 자본을 증대시켜 산업 국유화의 기초를 다질려고 하는 성향을 띄고 있었다.
1)케인즈경제학의 현대적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