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과 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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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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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통일왕국 수의 등장 이후, 한동안 고구려와 수는 서로가 서로에게 사신을 보내 겉으로는 평화를 원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더없이 날카로운 신경전이 오가고 있었다.
* 문명전쟁의 시작
- 수와의 1차 전쟁: 강이석의 대활약과 수나라 30만 대군의 전멸
평원왕은 수가 고구려를 공격해 올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병기를 수리하고 곡식을 저축하는 등 방어체계를 마련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고구려는 수에게 핍박을 받았으나 여전히 수에 반기를 들고 있던 동돌궐과 연합하는 한편, 국내의 반발세력인 물길족에 대한 지배를 더욱 확고히 하며 국력을 정비했다. 평원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영양왕은 수나라에 대해 적극적인 강경책을 채택한다. 고구려는 요서지방의 전진기지이자, 요충지인 영주지방을 영양왕 9년 2월 말갈인으로 구성된 기병 1만을 보내 선제공격을 가한다. 비록 수나라 영주자사 위충의 효과적인 방어에 의해 물러서고 말았지만 수나라 북방 전진기지에 큰 타격을 한다. 수 문제는 고구려의 침략소식을 듣고 즉시 공격할 것을 명한다.
그 해 6월, 수나라는 양량을 앞세워 수군과 육군 30만 대군으로 고구려 공격을 감행한다. 수나라 육군은 임유관을 나와 공격을 시작했다. 당시 만리장성에서 조양에 이르는 지역에는 수의 유주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에 비록 수가 유주라는 거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종의 군사적 전진기지에 불과했다. 그런데 고구려는 수의 1차 침입 직전에 먼저 공격하여 수나라 군대의 중간 보급기지가 되지 못하도록 그 기능을 무력화시킨다. 그것이 수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마다 항시 군량의 수송 문제로 곤경에 빠지게 된 원인이다. 과 에서는 수나라 육군이 이 때 큰 장마를 만나 군량의 수송이 계속되지 못하여 군사들이 굶고, 또 병에 걸렸다고 했다. 결국 9월에 전군이 철수를 하게 되었는데 죽은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 될 정도였다.
- 수나라의 2차 침입: 수나라 100만 대군과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고구려는 수가 다시 침입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국력을 다졌다. 고구려는 수를 견제하기 위해 영양왕 18년에 동돌궐에 사신을 보낸다. 당시 동돌궐은 수나라의 힘에 굴복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고구려는 외교적 노력을 통해 수를 포위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 사신이 동돌궐의 왕 계민가한의 막사에서 수나라 양제를 만나고 만다. 그러자 수는 고구려가 동돌궐과 연합하여 수를 공격하려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고구려에 대한 침략을 준비한다.
607년 8월, 동돌궐에서 수양제가 고구려 사신을 만난 이후 시작된 수의 고구려 침공계획은 1차 침입과는 달리 주도 면밀하게 준비된다. 수의 군대는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어 각기 12개 군으로 나뉘어 편성되었는데, 이들이 탁군을 출발할 때 각 군의 간격을 40리 정도를 유지하여 선발대에서 마지막 후미부대의 출발까지 40일이나 걸렸고, 그 행군 대열이 구백육십 리나 되는 거대한 규모였다.
수양제는 요동성 공격에서 별다른 성과가 없자 요동성 공격을 계속하기는 하되, 별동대를 조직하여 고구려 수도를 향해 진격하는 작전을 구사한다. 이 때 지휘자는 우문술과 우중문이었다. 이들 별동대는 수나라의 최정예 부대였다. 그러나 이들은 처음부터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들이 군량보급로를 지키는 것을 포기함에 따라, 식량을 자체적으로 보급해야 했기 때문에 군사들은 100일 분량의 식량 등을 지급 받아 휴대했다. 이것은 개인이 감당하기에 지나친 분량이었기 때문에 행군 도중 군사들이 식량을 버리고 가는 경우가 생겼다. 처음부터 심각한 군량부족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적의 사정을 탐지한 고구려가 취한 것은 청야전술이다. 즉 적이 이동 중에 고구려 땅에서 식량을 얻지 못하도록 백성들을 그들의 살림살이와 함께 성으로 옮기거나 전쟁지역에서 멀리 피신하도록 한 것이다.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적의 약점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압록강을 건너 수군 진영으로 들어갔다. 을지문덕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수나라 장군들을 그를 잡으려고 했지만, 을지문덕은 잡히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무사히 탈출한다. 당당하게 적진 깊숙이 들어가 적을 희롱하고 적을 유인한 을지문덕의 전략에 수나라 우중문은 당한 것이다. 우문술 등 여러 장군들이 군량 부족을 이유로 철군을 주장했으나, 을지문덕에게 희롱당하고도 그를 잡지 못한 우중문이 을지문덕을 이기겠다고 고구려 내부로 깊숙이 진격하기로 결정한다. 을지문덕은 적의 약점을 파악했기 때문에 적을 더욱 끌어들이기 위해 약한 병사들로 적에게 승리를 안겨준다. 수나라 군대는 자신들의 결정적인 취약점과 고구려의 전략에 걸려들었다는 상황을 깨닫지 못하고 자만심이 고조되어 속전속결로 전쟁을 마무리하고자 살수를 건너 7월 초순에는 평양 북쪽 30여 리까지 쳐들어온다. 이에 을지문덕은 평양성 북방 20여 리 지점에 정예부대를 배치하고 수나라군과 대치하면서 적장 우문중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보내 저들의 무모한 진군을 풍자하고 철군할 것을 종용한다.
“ 신책구천문-그대의 신기한 전략은 하늘의 이치를 알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