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유토피아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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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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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신동엽, 유토피아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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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는 말
Ⅱ. 본론
1. 작가소개
1) 시대 상황
2) 신동엽의 생애
2. 신동엽의 시세계
1) 신동엽의 시론
2) 작품 소개
(1) 50년대 - 전쟁 체험의 고통
(2) 60년대 - 4.19혁명의 환희와 절망
①. 4.19
②. 억압
③. 극복의지
④. 유토피아, 통일소망
3.수식어로 보는 신동엽
1) 참여시인 신동엽
2) 민족시인 신동엽
3) 저항시인 신동엽
Ⅲ. 결론
Ⅳ. 참고 자료
Ⅰ. 들어가는 말
신동엽은 한국 현대사의 격변기를 살다 간 시인이다. 우리 현대사의 격변은 곧 현대시사의 갈등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고통의 틈바구니에서도 그의 문학은 확고한 입지를 보여주고 있다. 즉, 등단 이후 그는 모순된 우리 민족사의 ‘껍데기’를 벗겨 ‘알맹이’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능동적인 시 정신을 추구하는 한편, 현대문명의 모순에 대한 비판을 가해 왔다. 즉, 그의 시세계는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 1919년의 3.1독립운동, 1960년의 4.19혁명 등 모순된 역사에 대한 저항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우리 민족사의 알맹이 찾기에 중심을 두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현실 극복 정신 및 미래 지향성의 추구라는 시세계를 지속적으로 형상해 왔다.
신동엽 시의 전반적인 특징은 현대 사회의 삶과 문명에 대한 비판, 그리고 민족의 모순된 역사에 대한 동경으로 나타난다. 오늘날까지 신동엽 시에 대한 다양하고도 방대한 연구가 이루어지는 이유는, 우리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뿌리 깊은 인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발표문에서는 신동엽 시에 나타나는 시인의 비판의식에 주목하며, 신동엽 시인에게 있어서 4.19학생혁명의 의미와 시인의 유토피아적 세계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작가소개
1) 시대 상황
(1) 해방 전
해방 전의 상황은 매우 암담했다. 특히 1930년대 후반 이후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등 침략 전쟁을 도발함으로써 세계를 전화 속에 몰아놓은 일제는 전쟁의 수행을 위해서 식민 통치의 철저한 통제와 탄압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 시기에 일제는, 한국어의 사용을 금지, 창씨개명을 강제함은 물론, 민족 언론지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시키고, 작품 발표의 매개인 문예지 문장과 인문평론마저 폐간 또는 개제시키는 등, 문학 활동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한편, 전시동원의 명목으로 국민 총력 연맹이란 조직 단체를 결성, 한국 사람에 대한 이른바 황국 신민화 운동을 전개하고, 신사 참배와 궁성 요배를 강제하였으며, 징병제의 실시와 학병제의 시행 등으로 무고한 한국 사람의 인명과 재산을 모조리 바칠 것을 강요했던 것이다.
(2) 해방 후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의 기쁨은 잠시였다. 해방은 미군정기의 시작이었으며 미군정의 시작은 이미 분단의 서막을 알리는 징후들을 내포한 것이었다. 또한 좌우익의 대립으로 인한 사회적인 혼란이 거듭되고 있었다. 1948년 8월 15일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1948년 9월 9일 북한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분단이 사기화 되면서 한반도에는 적대적 두 정권이 구체적 실체로 나타났으며, 제주의 4.3항쟁으로 촉발된 여수, 순천의 무장봉기로부터 유격전의 형태를 띤 무장투쟁이 시작 되고 있었고, 2차 무장투쟁(1949.6-10)과 3차 시기(1949.11-6.25직전)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로 적대적 불신의 골이 깊어지면서 혼란이 극으로 치달아 결국 6.25가 발발했다. 이후 전쟁은 끝나지 않은 채 휴전으로 총성은 멈춘다. 10년 뒤에 발생한 4.19는 자유당 정권하에서 극단적으로 억압되었던 민족주의적 정열이 부활하는 계기였다. 1950년대에는 6.25의 참혹한 경험과 독재 권력을 유지, 강화하려는 자유당 정권에 의해 극단적인 반공 이데올로기가 강요되었고 이 때문에 민족의 화해나 통일 문제는 표면적으로 거론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1960년대의 벽두에 터져 나온 4.19의 함성은 그동안 억압되었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와 함께 민족의 화해와 통일에 대한 열망을 부활시켰다. 이 같은 4.19의 정신은 문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신동엽이 외세를 극복하고 외세와 이데올로기에 의해 분열된 민족의 화해를 소리 높여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4.19의 직접적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4.19는 순수 문학과 모더니즘이 지배하고 있던 우리 문학에 민족 문학과 민중 문학이 복권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해 준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화의 열망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좌절되고, 민주화의 과제는 근대화의 발전 논리와 냉전 체제의 안보 논리에 휘말려 결국 길고 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하지만 3년 뒤인, 1964년 3월 24일 서울대학교,연세대학교,고려대학교 등에서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는 시위가 발생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위는 3월 30일 11개 대학의 학생대표들이 박정희를 면담하고 요구사항을 전달함으로써 일단 진정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가 한일회담을 계속 추진하자 4월 19일을 전후하여 학생시위는 다시 일어났고, 6월 3일에는 1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에 박정희는 오후 8시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병력을 서울 시내에 투입하여 3개월가량 계속되던 시위를 진정시켰다.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일체의 옥내외 집회·시위의 금지, 대학의 휴교, 언론,출판,보도의 사전검열, 영장 없는 압수,수색,체포,구금, 통행금지시간 연장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참고문헌
Ⅳ. 참고 자료
- 「김수영과 신동엽」- 이승규
- 「월간문학」 창간호(1968년)
- 「민족시인 신동엽」 - 강현철, 구중서 편
- 「신동엽, 60년대 의미망을 위하여」- 김준오
- 「신동엽 전집」증보판, 신동엽, 창작과비평사, 1997
- 「신동엽 시 연구」, 김창완, 시와시학사, 1997
- 신동엽문학의 현실대응 양상 연구 / 김명수 [건국대 석사 논문]
- 신동엽 시에 나타난 현실인식 / 양윤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