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스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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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스 보고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 가우스의 생애
생애 초기 (1777-1798)
가우스의 아버지는 가우스가 자신의 뒤를 이어 벽돌공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가우스가 수학과 과학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을 지원해주지 않았다. 가우스는 처음에 그의 어머니로부터 지원을 받아 공부했고 후에는 브룬스빅(Braunschweig) 공작의 지원으로 1792에서 1795년 사이에 카롤링 학교(Collegium Carolinum, 지금의 Technische Universitat Braunschweig)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후에 괴팅겐 대학으로 옮겨가 1795년에서 1798년까지 머물렀다. 괴팅겐 대학에서 가우스는 독립적으로 몇 가지 중요한 이론들을 독립적으로 재발견 하였다. 1796년에 그는 변의 개수가 페르마 소수인 정다각형은 자와 컴파스만으로 작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였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수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온 작도 문제에서 주요한 발견이었고, 마침내 가우스가 언어학 대신 수학을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1796년은 가우스와 정수론 모두에게 가장 생산적인 한 해였는데, 가우스의 가장 큰 기쁨이 3월 30일에 정17각형의 작도법을 발견한 것이다. 가우스는 이 결과에 너무나 기뻐한 나머지 아르키메데스가 묘비에 원기둥에 내접한 구를 새겼고 베르누이가 묘비에 로그 나선을 새긴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묘비에 정17각형을 새겨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요청은 사람들이 원과 혼동할 것을 우려하여 받아들여지지 않고 17개의 점으로 된 별을 대신 조각하였다. 또 그밖에도 그는 정수론의 영역에서 나머지 연산(modular arithmetic)을 발견했고 4월 8일에 최초로 2차 상호관계의 법칙을 증명해 보였다. 이 놀라운 일반 법칙은 수학자들이 이차 방정식의 해결 가능성을 결정지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5월 31일에 추측된 소수정리는 소수들이 정수들 사이에 어떻게 분포하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가우스는 모든 양수는 세 개의 삼각수들로 나타날 수 있음을 7월 10일에 보이면서 그의 일기에 "Heureka! num = Δ + Δ + 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10월 1일에는 다항식의 유한한 영역에서 계수에 따른 해의 개수에 대한 연구 결과를 출판했다.
생애 중기 (1799-1830)
1799년 박사학위 논문으로 "대수방정식의 근의 존재 증명"을 썼다. 1변수의 모든 유리정함수(integral rational algebraic function)는 1차 또는 2차의 소인수로 분해된다는 것을 보였다. 가우스는 복잡한 숫자들을 넘어 모든 일정하지 않은 하나의 변수 다항식은 적어도 하나의 근을 가진다는 대수학의 기본 원리를 증명했다.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를 비롯한 수학자들은 가우스에 앞서 잘못된 증명들을 내놓았다. 그리고 가우스의 학술 논문은 달랑베르의 작업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오늘날에 기준에 따르면, 음수에 기인하여 조단의 곡선 원리를 사용한 가우스의 시도는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 세 개의 다른 증명들을 내놓았다. 1849년의 마지막 증명은 일반적으로 정확하게 여겨졌다. 그의 시도들은 그 방법에 따라 복소수의 개념을 명백하게 했다.
가우스는 또한 그의 1801년 책인 산술연구로 정수론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것은 나머지 연산(modular arithmetic)과 2차 방정식 상호관계의 법칙에 대한 첫 번째 증명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했다.
같은 해 이탈리아 천문학자 쥬세페 피아치(Giuseppe Piazz)가 세레스라는 작은 소행성을 발견했지만 그것을 며칠 동안밖에 관찰 할 수 없었다. 가우스는 그것이 다시 발견될 수 있는 위치를 정확하게 예상했다. 그리고 그것은 고타(Gotha)에서 1801년 12월 31일에 쟈크(Franz Xaver von Zach)에 의해 재발견되었고 하루 뒤엔 브레멘(Bremen)에서 하인리히 올버스(Heinrich Olbers)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쟈크는 가우스의 지적인 작업과 계산이 없었다면 세레스를 다시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록 가우스가 공작으로부터의 장학금에 의존했었지만 그는 이 지원을 불안정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천문학에서의 연구를 해나갔고 1807년 괴팅겐의 천문학 관측소의 박사 겸 괴팅겐 대학 천문학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1801년 1월 1일 피아치의 세레스 발견은 가우스가 커다란 행성들에 의해 방해받은 미행성의 운동에 대한 이론에 대한 작업을 하도록 이끌었다. 이 작업은 천체 운동 이론(Theoria motus corporum coelestium in sectionibus conicis solem ambientum, 태양 주위를 원뿔 모양으로 움직이는 하늘 전체의 운동에 대한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1809년에 출판되었다. 피아치는 세레스의 움직임을 단지 두 달 동안 밤하늘을 가로질러 3도 만큼만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때 세레스는 태양 빛 뒤로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몇 달 뒤, 세레스가 다시 나타났을 때, 당시의 수학적인 방법들로는 3도(전체 궤도의 1%)의 부족한 데이터로부터 위치를 추정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피아치는 그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때 23세였던 가우스는 그 문제에 관해 듣고 달려들었다. 석 달 동안 집중해서 작업을 한 뒤에, 그는 세레스의 최초 발견으로부터 약 1년 뒤인 1801년 12월의 위치를 예견했고, 이 예측은 0.5도 내에서 정확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과정에서 그는 또한 18세기의 궤도 예측에 대한 그 성가신 수학을 합리화했다. 천체 운동 이론(Theory of Celestial Movement)으로 몇 년 뒤에 출판된 그의 업적은 천문학적인 계산에 대한 초석을 마련해 주었다. 그것은 가우스 중력 상수(Gaussian gravitational constant)를 제시했고, 오늘날에 측정 오차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모든 과학에 사용되는 최소제곱법(method of least squares)을 포함하고 있었다. 1809년에 가우스는 정규분포 오차 가정 하에 그 방법을 증명 할 수 있었다. 그 방법은 1805년에 르장드르(Adrien-Marie Legendre)에 의해 더 일찍 설명되었지만 가우스는 자신이 1795년부터 그 방법을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천문학 소식지(Astronomische Nachrichten)에 실린 가우스의 초상 (1828)
가우스는 놀라운 암산능력을 가졌었다. 그가 소행성 세레스의 궤도를 어떻게 예측했냐는 질문에 “나는 로그를 썼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다시 그 질문자가 그가 표에 있는 수많은 숫자들을 어떻게 재빨리 보았느냐고 묻자 “그것을 보았다고? 그걸 왜 봐? 난 그냥 머릿속으로 계산했을 뿐이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1818년에 가우스는 그의 계산 능력을 실용적으로 사용하였는데 하노버(Honover)주의 측지선을 측량하여 이전의 덴마크 측량들과 연결 지었다. 그는 측량 작업을 위해서 거울로 태양광을 반사시켜 먼거리에서 위치를 측정하는 회광기(heliotrope)를 발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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