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의 은유 꿔다가도 하는 지랄 다시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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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재생의 은유 꿔다가도 하는 지랄 다시래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재생의 은유
-꿔다가도 하는 지랄, 다시래기
반년쯤 전 진도에서 열린 민속학회를 따라간 적이 있었다. 그때 이윤선 교수님께서 발표한 주제가 바로 다시래기였다. 다시래기를 나비에 은유하셨는데, 굉장히 인상적이라서 기억에 깊게 남았다. 반년이 지난 지금, 다시래기를 주제로 하여 감상문을 쓰고 있으니 이처럼 반가운 우연이 또 있을까 싶다.
나는 우리나라의 무속과 신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평소부터 제주도와 진도라는 지역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섬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진도는 섬이었다. 다리가 연결되기 전까지 완벽한 섬으로 존재하였는데, 바다와 인접해 있는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과 바다와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옥한 땅에서 자라나는 풍족한 농작물이 진도만의 특별한 문화를 만들었다. 남도 들노래, 진도 씻김굿 등등을 그 예시로 들 수 있다. 다시래기는 씻김굿이나 만가에 비해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민속 문화다. 진도에 관심이 많다고 말은 하면서 정작 다시래기를 모르다니. 모순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일까, 약간의 미안함 같은 감정도 있었기에 영상을 볼 때 집중하며 좀 더 주의 깊게 보았다.
처음에는 다시래기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상이 나면 장례식장에서 ‘아이고~’소리를 내며 울고 있거나 한쪽에 둘러 앉아 고스톱을 치고 있는 게 우리나라 장례의 보편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까닭이었다. 상이 났는데 웃고 떠들고, 춤추고 박수치고 놀다니. 게다가 전문 놀이꾼·재미꾼까지 불러서 노는 게 아닌가. 심지어 그들은 ‘거사, 사당, 중, 가상제’라는 역할까지 갖고 있었다. 나의 상식으로는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들이었다. 그러나 이어서 나오는 내레이션의 설명으로 다시래기의 가치와 의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흔히들 초상이 났다고 말한다. 초상, 초상집, 상갓집, 호상, 49재, 3년상, 제사, 차례……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단어들이다. 죽음에 관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인식은 아주 독특하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독특한 형식의 저승세계와 의례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망자는 7일에 한 번씩 총 7번 저승시왕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이때 환생의 길을 결정하는 마지막 재판이 죽은 지 49일째 되는 날에 열리기 때문에 49재를 지내는 것이다. 이러한 삶과 죽음에 대한 민족의식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게 다시래기라고 할 수 있다. 환생에 대한 인식은 불교의 윤회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며, 다시래기 중 아이 낳는 장면 또한 환생을 의미한다.
‘거사, 사당, 중, 가상제’와 같은 인물들의 등장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극의 내용에 있어 변형과 삽입이 많이 이루어졌지만, 먼 옛날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다시래기의 본질적인 형태는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재생의 극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래기. 다시래기의 어원은 3가지로 유추된다. ‘다시 해보자’, ‘다시는 오지 마’에서와 같은 ‘다시-’+‘나기(生)’가 그 세가지 어원 중 하나다. 다시래기는 재생이고, 환생이다. 망자는 죽음으로써 이승에서의 고된 삶을 마치고 저승으로 돌아간다. 이승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망자의 명복을 빌며 망자를 보내준다. 또한 망자가 좋은 곳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망자의 가족들을 위로한다. 그것이 다시래기다. 이 모든 과정은 상을 당한 집의 구성원끼리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같이 상여를 짊어지고 슬픔을 공유한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있다. 진도다시래기는 바로 그 격언의 생생한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참으로 본받아야 할 공동체 정신이 아닌가.
결국은, 바람이다. 망자가 좋은 곳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바람. 그 간절함과 염원이 다시래기를 탄생시켰고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오는 것이다.
영상을 보면서 문득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다시래기의 이름도, 형태도 아니지만 비슷한 역할을 하는 사람을 본 기억이었다. 엄마가 보여준 동영상이었는데, 어느 절에서 49재를 지내는데 가수 설운도 분이 와서 ‘사랑의 트위스트’를 흥겹게 부르는 영상이었다. 설운도씨 옆에서는 스님이 빠른 박자의 승무를 추고 있었다. 망자를 위한 자리이며 망자의 가족·친지들이 있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흥겨운 분위기가 공간을 달구었다. 처음에는 제사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음악이고 분위기라서 그저 웃기기만 했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래기에 대해 알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니 설운도씨가 다시래기의 역할을 하고 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 슬픔에 젖은 가족들을 위로하고 망자를 즐겁게 배웅하는 설운도씨와 다시래기의 놀이꾼들. 이름도 생김새도 부르는 노래도 다르지만 설운도씨와 전문 놀이꾼들은 본질적으로 같다. 예술의 역할에 대해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을 치유하는 역할 말이다.
이번 과제를 통해 여러모로 많이 배우고 깨달을 수 있어서 정말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래기야말로 이웃들과의 소통도, 정도 공동체 정신도 점점 없어져 가는 삭막한 현대 사회에 꼭 필요한 정신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