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의 삼봉집中불교 비판에 관한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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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정도전의 삼봉집 中 -불교비판에 관한 저서-
정도전은 신왕조를 개창함에 있어서 가장 공이 큰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조선 개국 이후 이룬 업적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불교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와 관련된 저술로는 심문ㆍ천답 2편, 심기리 3편, 불씨잡변 20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일련의 저서는 성리학을 학술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불교와 도교의 사회적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정치가적 안목에서 지은 것이다.
먼저 심문ㆍ천답은 우왕 원년에 지은 성리학 관계 저서로 불교의 인과응보설의 오류를 간단한 운문체의 시로써 비판한 것이다. 먼저 심문편은 마음이 상제에게 복선화악의 법칙이 제대로 준행되지 않는 까닭을 질문한 것이며, 천답은 상제의 이에 대한 답변으로 하늘과 인간은 기가 상응하여 인간이 죄악을 저지를 때에는 하늘의 기를 손상하여 하늘이 상도를 잃게 되며 복선화악의 법칙도 어그러지는 수가 있지만, 천리가 다시 안정되면 다시금 하늘이 상도를 되찾아서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글은 인간 사회를 주재하는 천리의 우위성을 인정하여 불교철학을 비판한 것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심기리는 태조 3년에 저술된 것으로 심난기(心難氣)ㆍ기난심(氣難心)ㆍ이유심기(理諭心氣)의 3편으로 되어 있다. 심난기는 마음이 기를 비난한 것이고, 기난심은 기가 마음을 비난한 것이며, 이유심기는 이가 마음과 기의 잘못을 깨우쳐 준 것이다. 여기서 심·기·이는 각각 불교ㆍ도교ㆍ성리학을 상징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불교철학과 도교철학의 오류를 상호 비판시킨 다음에 성리학으로 하여금 양자의 오류를 비판케 하는 일종의 변증법적 논리를 구사하고 있다. 물론 그의 불교와 도교에 대한 비판은 어디까지나 성리학의 입장에서 한 것이기 때문에 그 비판이 절대적으로 정당한 것이 아니며 성리학적 편견이 너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불교와 도교철학을 비판하는 강도의 열렬함은 그 자체로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씨잡변이다. 불씨잡변은 태조 7년에 그가 죽기 직전에 쓴 것으로 그의 배불사상을 집대성한 것이다. 여기서는 불교의 교리를 윤회설ㆍ인과설ㆍ심성설ㆍ지옥설 등 10여 편으로 나누어 조목조목 비판하고, 유교와 불교의 같고 다른 점, 불교의 중국수입, 불교 신앙에 의한 득화, 이단 배척의 필요성 등을 덧붙여 불교의 사회적 폐단을 낱낱이 폭로한 것이다. 그의 불교에 대한 철학적 비판은 심기리편에서의 비판과 마찬가지로 유교적 편견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자기 나름의 억측과 독단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어쨌든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렇듯 철저하게 비판한 것은 동 아시아 세계를 통틀어서 전무후무한 것으로 사상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불교나 성리학이나 다같이 이데올로기성을 가진 것으로 진선진미한 철학일 수는 없다. 그러나 여말ㆍ선초의 역사적 시점에서 생각할 때 불교보다 성리학은 분명히 전진적인 의미를 더 많이 가지는 것이므로 정도전의 불교비판은 사상사의 문맥에서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창출(創出)운동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정도전은 여말의 유학자 중에서는 가장 적극적인 개혁주의자인 까닭에 불교의 사회 경제적 폐단에 대한 개혁 의지도 가장 철저하였다.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려면, 그 철학적 기반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다시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철학 체계를 제시해야만 하였으니, 성리학이 바로 그러한 대용물로 이용되었다.
Ⅰ. 정도전(鄭道傳)의 생애
1. 정도전의 가계(家系)
단양팔경(丹陽八景)의 하나에 삼봉(三峰)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는 정도전의 출생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鄭云敬)이 젊었을 때 이곳을 지나다가 어떤 상(相) 보는 사람을 만났다. 상 보는 사람은 그에게 10년 후에 혼인하면 재상이 될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정운경은 그 말대로 10년 뒤에 삼봉에 다시 돌아와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서 아이를 얻게 되었다. 그 아이를 길에서 얻었다 해서 이름을 도전(道傳)이라 하고, 부모가 인연을 맺은 곳이 삼봉이므로 호(號)를 삼봉(三峰)이라고 지었다. 정도전의 어머니는 산원(散員) 우연(禹淵)의 딸로서, 우연은 우현보(禹玄寶)의 족인(族人)인 김전(金)이라는 중이 여비(女婢)와 통하여 낳은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정운경의 장모는 여비의 딸인 셈이요, 여비의 딸이 바로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도전의 출생 배경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단양 지방의 거족(巨族)이던 우현보의 집안에서는 이 사실을 굳게 믿었고, 이 때문에 정도전은 뒤에 대간(臺諫)의 고신(告身)을 얻지 못하여 출세에 큰 지장을 받게 되었다. 정도전이 고려의 구가 세신(舊家世臣)들과 정치적 갈등을 가졌을 때, 구신들로부터 가계(家系)가 바르지 못하고 불분명하며 미천하다는 험구를 여러 차례 듣고, 또 특히 우현보 일족과는 가장 심각한 구원(仇怨) 관계를 갖게 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정도전의 부계(父系)를 보더라도 그의 가문이 현족(顯族)이 되지 못함은 사실이다. 봉화 정씨(奉化鄭氏) 세보에 의하더라도 정도전의 가계는 고조(高祖) 정공미(鄭公美)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안동군 봉화현의 향리(鄕吏) 호장(戶長)임. 이었다. 그 다음 증조 정영찬(鄭英粲)은 비서랑 동정(秘書郞同正)을 지냈고, 조부 정균(鄭均)은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두 벼슬은 모두가 실직이 아닌 산직(散職)에 불과하다. 실직에 오른 것은 아버지 정운경에 이르러서이다. 정운경은 충숙왕 때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공민왕 때에 형부 상서(刑部尙書)에까지 오르고, 수령 재임시에는 선정을 베풀어서 《고려사(高麗史)》 열전에는 양리전(良吏傳)에 등재되었다. 정운경은 이렇듯 봉화 정씨로서는 처음으로 벼슬다운 벼슬을 하였지만 처신이 청렴결백하여 가산(家産)은 보잘것이 없었다. 정도전과 그의 두 남동생 및 누이동생은 정운경으로부터 약간의 노비를 상속받았다고 하므로 아무리 가난했다 하더라도 중소지주적(中小地主的) 경제 기반은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정도전의 집안은 신분적으로는 향리에서 출발하여 사족(士族)으로 성장한 전형적인 신흥 사대부라 할 것이며, 경제적으로는 중간계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2. 정도전의 출세와 시련
청소년기의 정도전에게 학문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이색(李穡)이었다. 정운경은 이색의 아버지 이곡(李穀)과 학우(學友)관계를 가져, 자연 정도전은 이색과 친밀하게 되었다. 이색의 문하에는 정몽주(鄭夢周)ㆍ이숭인(李崇仁)ㆍ이존오(李存吾)ㆍ김구용(金九容)ㆍ김제안(金齊顔)ㆍ박의중(朴宜中)ㆍ윤소종(尹紹宗) 등과 같은 인사가 모여들어 그들과도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공민왕 11년(1362)에 급제한 그는 충주 사록(忠州司錄)ㆍ전교주부(典校注簿)ㆍ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 등 하급 관직을 역임하다가 공민왕 15년(1366)에 부모가 모두 돌아가자 고향 영주(榮州)에 내려가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공민왕 19년에 성균관이 중영(重營)되자 성균 박사에 임명되어 이색ㆍ정몽주ㆍ이숭인ㆍ이존오ㆍ김구용ㆍ박상충(朴尙衷)ㆍ박의중 등과 더불어 성리학을 강론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이해를 깊이하였다. 이때는 바로 대륙에서 원(元)ㆍ명(明)이 교체되는 시기로서 공민왕은 안으로 유교를 부흥하여 중앙집권적 관료정치를 재정비하고, 밖으로는 반원친명(反元親明) 정책을 표방하면서 몽고로부터의 완전 독립을 꾀하고 있었다.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 성리학자들은 아직 뚜렷한 정치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하였으나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미래의 경륜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러나 1374년에 우왕(禑王)이 즉위하고 이인임(李仁任) 일파가 집권하면서 정세는 크게 바뀌고 신진 유학자들에게는 새로운 시련이 안겨졌다. 이인임 일파의 친원 반명정책에 반대하던 정도전은 마침내 개경에서 쫓겨나 고달픈 유적(流謫)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 나주(羅州) 부근의 회진현(會津縣)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고향에 4년간 복거하다가 다시 삼각산(三角山)ㆍ부평ㆍ김포 등지를 전전하면서 학문과 교육에 종사하였다. 우왕 9년에 함주(咸州)로 찾아가 이성계와 만날 때까지 10년간에 걸친 유배ㆍ유랑생활이 정도전에게 있어서는 가장 고달프면서도 가장 의미 있는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회진현에서 소재동(消災洞)의 부곡민(部曲民)과 생활하면서 그는 농촌 현실을 몸소 체험하고 그 체험을 많은 시문(詩文)으로 남겨 놓았다. 금남잡영(錦南雜詠)과 금남잡제(錦南雜題)로 이름붙인 글들이 그것이다. 심문ㆍ천답(心問天答)ㆍ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와 같은 성리학 관계 저서, 팔진삼십육변도보(八陣三十六變圖譜)ㆍ태을칠십이국도(太乙七十二局圖) 등과 같은 병서(兵書)가 저술된 것도 그의 10년간에 걸친 유배 시기였다. 개국 후에 저술된 일련의 저서들도 그 기본구상은 이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