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족의 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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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만주족의 흥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만주족의 흥기
1. 여진의 원류
수렵민이었던 여진족은 오랜 옛날부터 백두산과 흑룡강 사이에 생활터전을 잡고 살아왔는데, 16세기 말경부터 스스로를 만주라 호칭했던 통구스족이다. 이들은 이미 기원전 11세기부터 중원과 교역 및 조공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다가 여진족은 12세기 초에 이르러 금왕조(1115~1234)를 건립하고 송조(宋朝)의 북방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조(元朝)가 건립된 이후로는 몽고의 지배를 받다가 원조를 축출한 새로운 왕조인 명조(明朝)의 통치하에 복속되었다.
명조는 여진족을 직접 통치하기보다는 조공과 교역을 통하여 그들 스스로 중국문화와 생활방식을 수용하여 동화하도록 한 간적접인 통치방식인 기미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을 명조의 의도와 달리 오히려 명조에 대한 위협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2. 누르하치의 여진족 통일과 후금 건국
명나라는 여진족에 대해서 가급적 그들이 단결하지 못하도록 하는 분열정책을 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진족에게 어느 정도 힘을 주어 과거 원나라를 세웠던 북방의 몽골족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즉 오랑캐를 이용해 오랑캐를 견제한다는 이이제이의 외교방침이 여진과 몽골에 대한 명나라의 입장이었다. 이러한 명나라의 대 여진정책으로 여진족들은 오랫동안 분열하여 큰 세력을 키우지 못하다가 1500년대 후반 명나라의 정치적 부패와 무능으로 조금씩 그 세력이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당시 누르하치의 할아버지 교창과와 아버지 타쿠시는 명나라의 장수인 이성량에게 충성을 바쳐 부족의 명맥을 이어갔다. 이성량은 그 조상이 조선인으로 랴오둥 총병 자리에 있으면서 사실상 명나라를 대표하여 여진족들에게 경제적,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거대한 명나라 군사에 대항할 힘이 없었던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이성량의 명령으로 같은 여진족을 토벌하는데 앞장서 명나라로부터 관직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의 입장에서 여진족은 어디까지나 이용가치가 있는 오랑캐였을 뿐이었다. 이것이 결국 명나라를 위해 저쟁에 나선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명나라군에 의해 피살당하는 비극을 낳기도 하였다.
당시 이성량의 집에 볼모로 잡혀있던 누르하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고서도 제대로 된 항의 한번 하지 못했다. 누르하치는 훗날 명나라에 선전포고하면서 일곱 가지 큰 원한을 공표하였는데, 그 가운데 명나라 군사에 의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피살을 가장 큰 원한으로 삼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은 누르하치에게 이성량은 배상금과 아버지 타쿠시가 받았던 명나라 관직 ‘도독’의 직함을 주었다. 조부의 피 값으로 받은 지위와 자산을 바탕으로 누르하치는 군대를 일으켰다. 그는 먼저 상대하기 버거운 명나라가 아닌 자신의 주변부족을 통합하는 데로 군사적 힘을 썼다. 1589년 누르하치는 마침내 건주여진 부족 전체를 통일하였고 랴우둥 변방의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누르하치의 성장에 놀란 이성량은 그를 회유하기 위해 명나라 정부에 건의하여 용호장군이라는 직함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에게 높은 관직을 내림으로써 명나라에 순응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당근과 같은 임시방편이었다.
누르하치는 겉으로는 명나라에 철저하게 복종하는 척하면서 때로는 이성량을 이용해 물적 지원까지 받아내며 힘을 키워나갔다. 그 즈음 조선에 임진왜란 원병을 보낸 명나라 정부의 여진족 분열정책이 느슨해진 틈을 타 누르하치는 주변의 여진족들을 하나하나 복속시켜나가기 시작하였다. 누르하치는 1599년에 해서여진의 하다를 멸망시키고, 이어 1607년에는 후이파, 1613년에는 우라 등을 병합하여 여진족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1616년 마침내 누르하치는 나라를 개창하고 스스로 칸의 지위에 올라 국호는 금나라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대금으로 지었다. 여진의 이름도 만주라고 개칭하였다. 누르하치는 에르데니에게 명하여 만주문자를 만들고 팔기군 제도를 제정하였으며, 도성을 혁도아랍으로 옮겼다.
3. 태종 홍타이지
누르하치가 1626년 만 67세로 세상을 떠나자 이에 누르하치의 열다섯 아들 가운데 여덟째인 홍타이지가 즉위하였다. 그는 누르하치 못지않은 영웅의 풍모를 갖춘 지도자로서 후금의 제 2대 칸인 태종이었다. 그는 요동지배를 확고히 함과 동시에 많은 한인관료를 영입하고 국가조직을 군정과 민정으로 분리하여 전제군주 관료국가체제를 확립하여 갔다.
홍타이지의 즉위 당시 명나라와 교전 상태에 있어 주변 상황이 다소 어려웠으나 만주족과 한족과의 관계 등 국내의 융화를 꾀한 후 외정에 나섰다. 당시 조선 가도에 들어가 후방을 어지럽히는 모문룡과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적대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던 조선을 침입하여 종묘호란을 일으키고, 항복을 받아 후방의 안정을 꾀했다. 이어 또다른 적 몽골을 침공하여 후방을 더욱 안정히 하였다. 내몽골을 평정하여 링단 칸이 소유하고 있던 원나라의 전국 옥새를 손에 넣게 되는데 이것을 계기로 많은 소수민족군대가 합류하여 더욱 강대해 졌고, 국호를 대청, 즉 청나라를 개국하였고, 연호를 다시 숭덕으로 바꿨다.
홍타이지는 후방이 안정 된 후 중국 본토를 노리며 산해관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중원 제패의 꿈을 이루지 못한재 1643년 뇌출혈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그는 재위기간 동안 대청제국의 기초를 확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