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 론이 태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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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태준 론이 태준의 삶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태준론
1. 이태준의 삶
이태준은 1904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서 아버지 이창하와 어머니 순흥 안씨 사이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개화파였던 아버지는 조선관리의 등살에 못 이겨 가족을 이끌고 해삼위(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했다가 웅기에서 들어온 행인에게서 무슨 소식을 듣고는 땅을 치고 통곡하다가 병이 돋혀1909년 8월 사망하고 만다. 졸지에 가장을 잃은 가족은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배안에서 어머니가 유복녀를 분만하자 예정을 바꿔 함경북도 배기미에 내려 정착한다. 그러나 1912년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면서 이태준은 아홉살의 나이에 고아가 된다. 흔히 이태준의 자전적 소설로 평가하는 「사상의 월야」에 따르면 고아가 된 이후의 참담한 생활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다. 갖은 고생 끝에 휘문고보에 입학가지만 교주의 횡포에 저항하다 제적당하고 일본에 건너가 상지대학에 입학하지만 공기만 먹는 생활을 계속 했다. 이 무렵인 1925년 7월 《조선문단》에 「오몽녀」가 당선되며 문단에 나와서 「누이(1929)」,「가마귀(1930)」,「불도 나지 않았소(1931)」,「불우선생(1932)」,「달밤(1933)」,「색씨」,「복덕방(1937)」,「패강냉(1938)」,「영월영감(1939)」,「밤길(1940)」등의 역작을 발표하여, 30년대 대표적 작가로 활약했다.
순수문학의 추구
1933년 일제 탄압으로 〈카프(KAPF)〉 중심의 경향문학이 퇴조하자 이태준은 순수문학을 표방하면서 〈九人會〉를 결성, 순수문학을 이끌었다. 구인회는 이태준 말고도 정지용김기림박태원이상이효석김유정 등의 멤버들로 구성돼 있었다.
이태준은 1939년에는 《문장》지를 창간해 편집자 겸 주간으로 활약했고반영으로서의 문학보다기교로서의 문학을 추구했다.
사회주의자로의 변신
이태준이 광복 직후에 발표한 「해방전후」에서는 광복을 전후한 사상적 고민을 엿볼 수 있으나, 1946년 갑자기 월북하면서 놀라운 사상적 변모를 시도해 문단을 놀라게 했다.
월북 후 이태준은 한동안 북한 문단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이태준의 월북 후의 작품으로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발표한 「농토」의 경우에는 이태준 소설의 미적 특질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625를 전후한 작품집 『첫전투』와 『고향길』에 수록된 작품의 경우 「호랑이 할머니」를 제외하면 대개가 미군과 국방군에 대한 적개심 고취와 전투의욕 앙양을 위한 구호의 나열에 불과하며, 『첫전투』에 개작하여 수록한 밤길과 해방전후의 경우 발표 당시보다는 강렬한 계급성과 함께 과다한 정치사상성이 개입되어 있다.
한설야의 이태준 비판 그리고 숙청
1953년 남로당계의 숙청 때 제기된 이태준에 대한 비판 남로당계가 숙청당할 때 구카프계 문인들인 한설야, 이기영이 이태준의 작품을 고 비판했을 때, 이를 전방위에서 막아준 것이 소련파 들이었다.
은, 1956년 기석복정률 등 소련파가 제거될 때 다시 본격화된다. 이태준의 비판에 깊숙하게 개입했던 인물은 ‘한설야’였는데 그는 당 이론지 《근로자》(1956년 2월호)에서 구인회 시절의 이태준을 거론하며, ‘구인회는 카프를 반대할 목적으로 조직된 부르주아 반동 문화의 조직체로서 이태준이 조직자이며 지도자’라는 비판을 제기하였다. 광복 전에 발표된 이태준의 모든 작품이 반동적인 사상과 반사실주의 수법으로 일관되어 있고, 작품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무능력자, 아편쟁이, 장님 등 매우 부패한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이태준이 월북한 후 창작한 작품들에 대해서도 한설야는 시종일관 비판적 시각을 놓지 않았다.
이태준은 숙청 당한 후 노동자로 일하다가 10년의 추방생활 이후 평양으로 돌아왔으나, 1974년 다시 사상투쟁을 겪고 강원도 장동 탄광지구로 재추방 되었다. 그곳에서 부인이 죽은 지 얼마 후 이태준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망 연도 및 일시는 불분명하다. 조용복, 『월북 예술가, 오래 잊혀진 그들』, 돌베개, 2002, pp284-291